故 류찬우 풍산 회장 “한국 방위산업과 글로벌 신동산업 선구자"
故 류찬우 풍산 회장 “한국 방위산업과 글로벌 신동산업 선구자"
  • 김 길 홍(안동사랑운동본부 이사장·전 국회의원)
  • 승인 201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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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防産진흥으로 자주국방과 국가 안보에 기여

   
 

류찬우(柳纘佑) 풍산 창업주가 올해 방산인에 선정됐다.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최우석)926일 국방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방산인상 및 학회창립 23주년 기념식에서 풍산 류 선대회장을 특별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시상했다.
류찬우 회장은 68년 풍산을 설립하고 72년 국내 유일의 종합 탄약 공장을 건설해 각종 탄약을 국산화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특히 국내방위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주국방의 초석을 다졌으며 방산수출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필자가 류 회장을 만난 것은 60년대였다. 류 회장과 필자는 경북 안동 동향이며 류 회장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 후손이다. 집안간에도 서로 세교가 대대로 이어져왔으며 필자의 숙부 및 고모부와는 죽마고우였다. 신문기자, 대통령비서관,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고향의 존경하는 어른인 류 회장으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던 필자가 방위산업 발전을 주도한 고 류 회장의 발자취를 회고한다.

 

 

박정희전 대통령은 경제 발전과 자주국방을 국력신장의 기본축으로 삼는 국정철학을 실천한 지도자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는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내건 박 전대통령의 국가 경영방침에 따라 수출입국의 달성과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위해 정부와 국민이 함께 경제성장에 역량을 총동원하던 시기였다.

▲ 류찬우 풍산 선대회장
국가발전의 기반을 확충하던 70년대부터 박 전대통령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주국방과 국가안보를 특별히 강조하고 방위산업의 육성과 개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출증대의 중심역할을 하는 다양한 제품 생산 공장과 국가기간 산업시설을 안전하게 지키고 운영하려면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사전에 방어하고 대비하는 자주국방 장비와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제일의 급선무였다. 후방의 방위병력을 보강하는 향토 예비군을 창설한 다음 국군에게 필요한 국산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는 군수공장의 건설등 방위산업의 개발에 착수한 것도 바로이 때문이다.

청와대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하는 수석 비서관실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을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쯤 이었다.


필자가 방위산업 창업의 선견지명을 가졌던 풍산의 류찬우(柳纘佑) 회장을 만난 것은 65년 말쯤이었다.

풍산금속은 1960년 중반 서울 남대문 맞은편 해남빌딩에 둥지를 틀었다. 1950년대에 벌써 3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 등 해외에서 무역사업을 벌였던 류찬우 회장은 국내에 돌아와서예상과 달리 회사를 운영하면서 보수적인 기업 경영에 주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창업 초기 풍산금속 경영진의 면면을 살펴보면 수입 지출을 엄격히 따지는 은행 출신 간부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임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류 회장도 백면서생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초년 고생을 많이 하면서 성장했기에 일상생활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근검절약했다. 척박한 토지의 농촌 주변 환경과 유가(儒家)의 전통적 관습과 타고난 천성 탓인지 분수에 맞지 않는 회사운영은 스스로 자제했다.

따라서 회사를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대신 기업의 잠재능력을 축적하고 보강하려는 인력확보와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했다. 이 같은 류 회장의 일관된 경영철학이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탄약과 탄피 제조 방위산업을 창업한 동기라고 생각된다. 60년대 한국의 방위산업은 기술과 자본 두 가지 측면에서 장래가 불투명하고 성공여부를 담보할 수 없는 미지의 분야였다. 류 회장이 방산에 뛰어든 것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의 후손이라는 가문의 전통과 자부심이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국력이 미약해 일본의 침략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서애선생에 대한 류 회장의 충효(忠孝)사상이 동기라고 생각한다.

류 회장이 기자였던 필자에게 “남북분단의 현실과 북한의 적화위협에 맞서 자주국방의 기간산업인 방위산업을 경영해서 횡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창업의 목적을 설명했다. 류 회장은 이같은 심경을 정부당국과 동종업계 관계자에도 가끔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류 회장은 1960년대 말부터 방산분야 진출을 결심하면서부터 향후 방산의 원자재로 사용되는 신동(伸銅)제조공장의 건설에 필요한 자본투자와 기술개발을 일찍부터 준비했다. 공장건설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풍산금속의 운명과 미래를 좌우하는 사업은 바로 구리를 사용하는 신동가공 산업이라는 사실을 임원과 간부들에게 설득하고 교육하는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회사를 우연하게 방문했을 때 회사 임원과 부하 직원들에게 신동산업의 중요성과 사업추진의 절차를 특유의 안동사투리로 큰소리로 말씀하신 광경을 자주 봤다.

류 회장은 구리가 필수소재로 사용되는 방위산업의 본격 진출과 더불어 동 파이프도 제작하고 판매가 보장돠는 동전(銅錢)의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공장을 구상하고 착실하게 계획을 추진해왔다.

당시 우리나라업계에서 신동제조등 비철금속 공업분야는 걸음마 단계였다. 풍산금속은 다른 기업에 비해 자본과 인력은 취약했지만 기술정보와 제조기술은 단연 앞섰다. 그것은 약관 20대에 외국에서 사업하면서 얻은 류 회장의 다방면의 경험과 탁월한 경영능력 덕분이었다. 45세의 류 회장은 그때 이미 동을 원자재로 사용하는 한국 비철금속 공업의 선구자가 되기에 충분한 CEO의 자질과 경륜을 갖추고 있었다.

신동(伸銅)산업 선발 주자 대기업들과 어깨 겨뤄

▲ 류진 회장
풍산금속이 신동공장 건설을 착수할 당시 국내에서는 신동분야 기초산업과 제조업에 이어 동제련 사업과 방위산업에 참여하려는 대기업들 간의 경쟁과 선두 다툼은 치열했다. 동제련 공장의 건설 경합에는 국내굴지의 대기업인 LG와 대한전선 등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종합 탄약공장의 건설은 선발기업인 한국화약이 실적과 기술을 앞세워 욕심을 냈다.

이들 경합회사 모두가 풍산금속 보다는 재계순위가 훨씬 앞서는 대기업이었다. 관계부서의 승인과 허가를 받기위한 막전막후의 대정부 로비와 대언론 홍보도 전개했다. 풍산금속은 LG, 대한전선, 한국화약 등 유수한 기업과 숨가쁜 힘겨루기를 벌인 끝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로 실력을 평가받아 국내 신동산업 선발주자의 위치를 확보했다.

건설현장을 밤낮으로 직접 지휘해온 류회장의 뚝심은 드디어 1969년 가을 경기도 부평에 연산 4만 톤 규모의 신동생산 공장을 국내 최초로 완공시켰다.

국제 동전소재 시장 풍산, 점유율 세계 1위

이로써 풍산금속은 국내유일의 동 파이프, 동전소재, 탄약과 탄피의 제조, 동합금 제품 등 비철금속의 기초자재를 국내에 공급하고 해외로 수출하는 길도 열었다. 불과 3년여만의 단기간에 류 회장의 남다른 경영수완과 불굴의 집념이 기적같은 성공을 만들어 냈다. 가동을 시작한 풍산 금속의 부평 신동공장은 오늘날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움한 풍산의 도약과 성공의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삼성, 현대, 대우, LG, 한국화약, 롯데, OB, 진로, 대림, 대농, 포철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비철금속 생산업에 진출한 풍산금속의 탄생과 약진에 놀라지 않을 수없다. 한국의 철강왕이라고 불리우던 포항제철의 박태준회장도 그때 경탄과 찬사를 보냈다.

특히 풍산금속이 재계의 주목을 끈 것은 신동공장의 건설과 기술개발 외에도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류 회장의 해외 섭외 능력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동광산을 소유한 외국과 공급계약을 체결하여 필수 원자재의 안정적 공급선을 선제적으로 확보한 사실이었다.

대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신동공장부터 먼저 세운 류회장은 6.25 격전지였던 경북 안강에 73년 종합탄약 공장을 국내 최초로 건설했다. 그 뒤 80년과 88년 온산 제1.2 동제련소를 완공해 연산 30여만 톤 규모의 비철금속 대규모 생산체제와 시설을 갖추었다.

안강 공장에 이어 82년에는 부산 동래의 육군조병창 공장을 인수해 소구경탄을 본격 개발 생산하여 종합탄약 공장의 설비도 대폭 확충했다.

국내외 인사와 한번 맺은 인연 소중하게 보살펴

정부 각부처 장차관.청와대 수석비서관.국회의원등 고위공직자와 재계총수들은 필자가 중앙일간지 정치부장,청와대 출입기자, 대통령비서관,국회의원으로 재임할 당시는 기사의 취재대상이었다. 또 소관 업무상 연관이 많아 대화하고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젊을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뵙고 말씀을 경청했던 풍산의 창업 류 회장의 주변 인맥관리는 각별한 것 같았다. 사업하고 장사하는 기업인들은 필자가 경험해 보면 필요하면 접근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멀리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류회장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인의예지신의 덕목을 중시하는 특유의 영남 선비 정신에 소홀함이 없도록 가족과 친지들에게 늘 강조해왔다.

유가(儒家)집안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손님 대접하는 접빈객(接賓客)의 예절 갖추기는 류 회장 만큼 그대로 따르고 자키는 분은 없을 것이다. 이같은 선비집안의 몸에 벤 처신은 민·관 유력인사는 물론 해외의 기업파트너 등과 맺은 인맥과 인연을 평생 성심성의를 다해 잘 관리하고 보살피는 정성을 다했다.

류회장이 접빈객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훗날  안동 풍산면 하회 고향마을에 한식의 전통고가(古家)를 신축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엘리자베스 영국여왕과 부시 부자 전 미국대통령 등 국내외 손님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수출입국과 공업발전을 통해 경제성장에 전력 투구하던 60~70년대부터 풍산 류회장은 자세한 인연과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신격호 롯데,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등과도 두터운 친교를 맺었다.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그분들이 롯데 호텔 일식당에서 가졌던 오찬 모임에 우연히 동석하여 호형호제하던 담소현장을 지켜본 기억이 있다.

요즈음 업계와는 달리 관 주도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던 60년과 70년대에 대기업과 국가기간 산업을 경영하려면 유관 정부기관과 정치권력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뚜렷한 후원배경이 없었지만 류 회장은 60년대 후반부터 청와대의 정소영 경제수석,김시진 민정수석, 오원철 중화학공업 수석비서관을 비롯하여 이낙선 상공부장관, 고재일 국세청장, 박태준 포철회장등과 오래전부터 공사간에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박 전대통령은 68년경 부터 풍산금속의 실정과 류 회장의 인품에 대해 관계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아 온 것으로 짐작된다. 박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풍산금속 류 회장의 방위산업에 대한 강한 참여 의욕과 출중한 개발노력을 주변 인사들에게 여러 차례 높이 평가했다.

당시만 해도 방위산업의 역사와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탄약과 탄피 공장 건설의 설계도면을 작성하려해도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무척 어려운 실정이었다.

실무 경험은 물론 개발 실적조차 일천했던 그때, 류 회장은 자주 해외로 출장 나가 선진국의 유사 설계도면을 훔치다시피 구해 와서 안강 공장을 예정대로 공기 안에 건설할 수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같은 공장 준공의 후일담을 보고 받고 공사석에서“분단된 이 나라에서 첫발을 내딛는 각종 방위산업은 풍산금속의 류 회장과 같이 외국의 공장 설계도면을 훔쳐올 만큼 열정과 배짱을 갖고 추진해야 조속히 발전시킬 수 있다”고 여러차례 칭찬했다. 필자의 오래된 취재수첩에서 찾아낸 사실이다. 당시는 방산내용은 보안사항이라 함부로 기사를 쓸 수 없단 시기였다.

종합탄약 안강 공장이 완공되던 73년 이른 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내 최초 최대 규모로 건설된 안강 공장의 현장을 시찰했다. 자주국방과 유비무환을 역설해 온 박 전 대통령은 국방에 대한 자신의 노력과 의지가 처음으로 열매 맺은 풍산금속 안강 공장의 완공 사실이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헬기편으로 공장 현장에 미리 온 대통령 일행은 버스로 수행하던 출입기자들이 공장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장내부 시찰 일정을 늦추고 있었다. 대통령은 출입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한 뒤 수행기자들에게 일일이 공장 내부시설과 탄약 생산과정을 직접 설명해 주었다.

생산실적이 초라했던 한국방산업계에서 국제수준의 종합탄약공장을 세운 대통령이 자부심과 흐뭇함을 감추지 않고 앞장서 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자랑했다.

그 뒤 여러번 공장규모를 확장했겠지만 안강 공장은 그야말로 풍산금속 류 회장의 투철한 사업보국의 정신과 박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리더십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합작품이라고 후세에 평가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국내 첫종합탄약공장 대통령이 직접 설명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80년 초 국내 방위산업과 중화학 공업은 한때 취약한 재무구조 때문에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

풍산금속은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계속 성장하여 재벌들이 참여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류 회장은 82년 방위산업회장에 취임하여 한국의 방위산업계를 대표했다. 1990년대 들어서 서도 급성장을 이룩하여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지금의 풍산그룹으로 일으켜 놓았다. 류 회장은 99년 정부로부터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에 헌신한 공적을 인정받아 민간인으로서는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50여년 동안 언론계와 정치권에서 반평생을 보내며 류 회장을 지켜본 필자의 평가를 덧붙인다면 鶴麓柳纘佑회장은 무(無)에 서 유(有)를 창조한 자수성가형 기업인이었다. 류 회장의 사업경영의 폭넓은 안목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유의 경영 능력은 말 그대로 탄복과 격찬을 금할 수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수성가형기업인 평가

류 회장은 반세기동안 풍산의 창업과 수성에 평생을 골몰하다가 1999년11월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셔서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추모의 마음이 간절하다. 선대 류 회장은 창업한 풍산그룹을 계승하여 장차 세계적인 대기업의 모델을 선도할 후계자로 현 류진(柳津) 회장을 지명하고 경영 총괄의 권한과 책임을 맡기고 세계로 도약하는 기업이 될 것을 당부하는 유언을 남겼다.

50대의 류진 (주) 풍산 회장은 경영을 이어받은 지난 15년 동안 풍산을 글로벌 선진기업으로 확장하여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매출을 증대시켜 풍산을 세계적 일류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해외의 명문대학과 사업현장에서 선진 일류 경영을 수업한 류진 현 회장은 국내보다 해외 진출을 꾸준하게 실천해 경영성과와 기업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류진회장은 또한 선대 회장이 못다 이룩한 유지와 유업을 받들어 기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장학사업과 공익봉사 등 각 분야의 사회공헌 사업도 폭넓게 기여하고 후원하고 있다.

류진 회장은 이와 함께 지금도 영남 유림 반가(班家)의 후예답게 예의 바르게 처신하고 올곧은 선비의 몸 가짐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있다. 생전의 류찬우 선대회장을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은 오늘의 풍산과 현 류진회장을 지켜보면서 늘 흐뭇하고 기쁘기 한량없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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