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분할’ 깨진 이유 … 지나친 자식사랑이 문제
‘황금분할’ 깨진 이유 … 지나친 자식사랑이 문제
  • 최수아 기자
  • 승인 2012.05.08
  • 호수 8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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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쩐의 전쟁’ 6 - 금호①

“감히 내 밥그릇에 탐을 내?”
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신문]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형제 경영’의 전형적인 폐단을 보여준 금호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이 1946년 광주택시를 창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운수업이 낙후됐던 광주 전남지역에 택시사업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 지인들에게 투자를 받아 택시 두 대로 출발했다. 박인천 창업주는 ‘정시정차’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자동차가 귀한 지역인데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도로 상황에 고객들이 제 시간에 차를 탈 수 있도록 했다.

광주택시는 금세 광주의 명물로 자리 잡았고, 박인천 창업주는 여세를 몰아 고속버스사업에까지 사업을 확장,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틀을 마련한다. 광주에서 장성, 화순 노선을 시작으로 회사명칭도 광주택시에서 광주여객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영업 확대를 꾀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영업중단 위기에도 부서진 부품을 수거해 차를 조립, 목탄차 2대를 조립하는 역량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휘발유 동결로 3개월간 운행정지라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도 “회사는 내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의 것”임을 강조, 포기하지 않고 전라남도 최대 여객운송업체로 성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런 박인천 창업주에게도 근심은 있었다. 타이어 부족이 사업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는 결국 타이어를 구하는 대신 직접 생산키로 결심하고 1961년 타이어공장 착수에 돌입한다.

기술부족과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히 전문기술자를 영입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불에 휩쓸려 전소됐음에도 경영정상화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 10대 타이어 브랜드 중에 하나인 금호타이어의 전신 삼양타이어의 출발이다.

이후 타이어 사업은 승승장구 했다. 4년 만에 KS마크를 획득,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미국 회사와 타이어 개발 기술제휴도 맺으며 국내 최고의 타이어 메이커로 부상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동생에게 회장직 물려주겠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체제의 본격적인 출범은 1972년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을 설립하면서부터다. 명칭은 박인천 창업주의 아호인 ‘금호’를 따서 지었으며 출범 4년 만에 계열사를 12개로 확대될 만큼 빠른 성장세를 나타냈다. 그렇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표 계열사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고 1984년 박인천 창업주가 타계함에 따라 장남 박성용 명예회장(당시 금호실업 부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됐다.

박성용 명예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제 2도약을 위한 정비를 시작, 공중과 육상에서 승객을 수송하는 운송업체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의 전기를 마련한다. 1988년 2월 항공사업 진출을 알리며 대한항공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로 급부상, 국제적 기업으로 키워낸다.

‘인간 자산의 중요성’을 강조한 박성용 명예회장은 1996년 동생 박정구 당시 그룹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기 전까지 4조원이라는 매출액을 달성하며 외형을 크게 키웠다. 사회 공헌과 환원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으며, 박인천 창업주의 경영원칙에 따라 ‘형제 공동경영’을 충실히 이행했다.

박용성 명예회장은 65세가 되면 경영권을 형제에게 승계한다는 ‘65세 룰’을 만들었으며, 2세들의 지분분배와 관련해서도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분란이 발생할 수 있음에 주목해 남자들에게만 상속했다. 주요 사안에 대해서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5남 박종구 아주대 교수를 제외한 4형제의 합의를 최우선으로 했다. 만일 합의가 불발될 경우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게 했으며 그래도 결정 나지 않을 경우 가장 손윗사람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25년 형제 경영’ 막 내리다

형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정구 회장은 박용성 명예회장은 다른 경영스타일을 선보였다, 경제 이론을 중시했던 형과는 달리 공격적인 추진력을 발휘하는 현장중심의 경영방식을 택했다. 박정구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아주생명을 인수, 금호생명으로 명칭을 바꾸고 보험업에 진출했다. 또한 전국에 잇달아 콘도도 개장하는 등 관광 레저사업 부분도 확대해 나갔다.

박정구 회장의 남다른 추진력은 1997년 IMF위기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계열사간 합병, 지분매각, 청산 등을 통해 한계사업과 비주력사업부문을 과감히 접었으며 재무구조를 개선시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65세이던 2002년,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경영권은 자연스레 삼남인 박삼구 회장에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 같은 금호가의 아름다운 형제경영 승계 전통은 ‘대우건설 재매각’이란 암초를 만나면서 불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대우건설을 되팔기로 한 이후 4남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부자가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대폭 사들이면서 형제 공동 경영 원칙의 ‘황금비율’을 깬 것. 25년 형제 경영 전통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금호가의 전통대로라면 박찬구 회장은 그 다음해에 그룹 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돈 앞에서 25년이나 이어져 온 가문의 전통도, 형제애도 없었다. 경영권을 향한 욕심이 결국 화를 자초, 동반퇴진에 검찰 고발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고질적인 형제경영의 폐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형제간의 불협화음은 박정구 회장의 7주기 추모 행사 때부터 감지됐다. 박찬구 회장과 박삼구 회장은 추모식 내내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물론 끝난 뒤에도 인사 없이 박찬구 회장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떠 불화를 직감케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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