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마음의 여독
"나의 연인 J에게" - 마음의 여독
  • 김충교
  • 승인 2012.01.02
  • 호수 8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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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서울나들이였습니다.

역사에 내렸을 때 눈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올 겨울 처음 보는 눈이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환승하는 전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한산한 전철 안의 풍경은 차분해 보였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속에 갇힌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늦은 귀갓길을 서두르는 정장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보였습니다.

일을 하다 늦은 듯 얼굴에 취기는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의 흔하디흔한 서울의 전철 풍경일 겁니다.

그런데 왠지 약간 낯선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의 차림새나 표정이 생경했거든요.

모두 깔끔하고 심플한 차림이었습니다.

순간 역시 서울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투리를 소재로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희화화한 코너가 스쳤습니다.

이 코너는 말씨가 아니라 서울이 갖는 우월적 지위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 느낌이고 판단입니다.

연기자들은 똑같은 물건도 서울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르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웃고 넘기기는 하지만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무엇을 꼬집으려고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전철에서 내려 거리로 나온 후 바라본 풍경도 차분했습니다.

종종걸음을 치며 눈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습니다.

그래도 때가 때인지라 사람들이 약간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쨌든 연말연시이니까요.

수 십 년 넘게 서울에 살았으면서도 전혀 낯선 타지에 와 있는 듯이 여겨졌습니다.

아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여유도 즐겼습니다.

부럽든 그렇지 않든 저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기본 관점이 생겼거든요.

까맣게 잊었던 겁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풍경 속에 섞여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풍경은 때론 아름답게 보이거나 차분해 보입니다.

하지만 풍경 속에는 자잘한 감정들이 서로 엉켜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나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부대낌이나 힘겨움이 전체 틀을 형성합니다.

사람살이의 고단함이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거든요.

그래도 잠시 타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맛보았습니다.

잠시 가졌던 허튼 생각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심야의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서울에 살면서 가까이 지냈던 이웃사촌들이 있습니다.

형 동생 하면서 허물없이 지낸 사이입니다.

아파트라는 단절된 공간에서도 이웃을 가진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산행을 함께하면서 우의를 다졌고 막걸리 한 잔에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엄마들끼리도 친해 어울리는데 부담도 없었지요.

서로 가진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벽은 없었습니다.

특급호텔의 쉐프인 후배 집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동네표인 기가 막힌 맛의 족발을 비롯한 안주거리가 넘쳤습니다.

직장에서의 위치와 연말이라는 특수상황에서도 일찍 퇴근해 기다려준 후배가 고마웠습니다.

오랜만에 이웃사촌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겁니다.

서로 사는 얘기를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더불어 한 잔씩 털어 넣은 술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버렸습니다.

일 때문에 늦게 합류한 후배가 왔을 때는 만취 상태였습니다.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풍경 속에 빠져버렸거든요.

그때 풍경 속에 감춰진 고단함이 무엇이었는지 잠깐 생각했습니다.

사진처럼 뇌리를 스치더군요.

아 그래 그거였어.

그래도 견디며 살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자리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의 특정 동네가 고향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다음날 집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노곤함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고속열차를 타고 가고 오는 것이지만 피곤했거든요.

여독이 밀려왔습니다.

숙취 탓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숙취와 피곤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친척들이 와서 시끌벅적하다가 다 가고나면 들곤 하던 그 기분.

휑한 분위기가 집안에 흐르고 마음까지 덮쳐버렸던 기억.

그건 뭔가 두고 떠나온 아쉬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정물화 같은 일상으로 복귀해야하는 자각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살처럼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일 수도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여독을 쉽게 털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난감했습니다.

아직도 아득한 유년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인생이란 여정의 과정을 거치며 느끼는 아련함일지도 모릅니다.

중년의 문턱에서 가끔 마음속에 뭔가 있어야 할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쉬움이나 후회 또는 그리움과는 약간 다른 그런 느낌.

말이나 글로는 설명하기가 모호합니다.

살아오면서 샛길을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아닌지.

이젠 더 이상 샛길도 나오지 않을 것이란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합니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마음과 씨름하기가 귀찮아졌거든요,

요즘 일종의 ‘마음의 여독’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많이 느낍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일상은 정지돼 있는데 시간은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넋 놓고 있다가 번쩍 정신이 들 때도 있습니다.

노곤하다고 이렇게 무감하게 살아도 되는지.

아직도 문은 열려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열린 문의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내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승천을 위해 흑룡은 똬리를 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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