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학생 인권 조례
“나의 연인 J에게 - 학생 인권 조례
  • 김충교
  • 승인 2011.0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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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교> 일요신문 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아주 오랜만에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허물없는 사이이니까요.

서울 살면서도 서로 하는 일이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서로의 직장 근처를 지나다 자리에 있으면 잠깐 얼굴이나 보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일과 후 시간을 내서 만나면 허리띠 풀어놓고 폭음을 하지요.

마주하면 대화의 절반이 욕입니다.

두 중년사내가 대포집에서 만납니다.

누군가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게 마련입니다.

그런 약속을 제대로 지키게 해주는 직장은 없거든요.

꼭 일이 생깁니다.

대포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들려오는 소리는 “야! 이XX야! 지금 몇 시야?”입니다.

만날 때 마다 욕을 먹는 대상자만 바뀔 뿐 반복되는 멘트입니다.

앉자마자 일 얘기 집안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상대를 부를 때 욕이 섞이지 않으면 어딘지 어색합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아저씨들이 욕지거리 섞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이들이 힐끔거리기 일쑤이지요.

아마 그들은 모를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세상 얘기를 할라치면 목소리의 톤은 높아지고 더 격해집니다.

세상 고민을 지고 가는 투사인 것처럼 말하거든요.

그러나 이내 한숨이 이어집니다.

무력하거든요.

그런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립다거나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다가 학창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문에 그럴듯한 문패를 단 기획기사가 실렸더군요.

연재형식의 시리즈였습니다.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겁니다.

진보교육감이 관할하는 지역의 학생들이 특히 그렇다는 겁니다.

기사는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싸가지 없음을 부추긴다고 말하더군요.

체벌을 금지한 학생인권조례 탓에 학생들이 선생님들에게 대들기 일쑤랍니다.

대들어도 선생님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더군요.

교육적 의도를 가졌다 해도 체벌을 했다가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학부모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선생님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건드렸다고 부모들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겁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기사는 학생들의 싸가지 없음을 진보교육감 탓으로 돌립니다.적어도 그런 뉘앙스를 강하게 풍깁니다.

해서 저에겐 진보교육감을 씹기 위한 기사로 비쳐집니다.

도대체 진보교육감과 학생들의 싸가지 없음이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육적으로 체벌이 필요하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헷갈리는 희한한 기사입니다.

친구는 그러더군요.

“타일러야지. 팬다고 애들이 말 듣냐”

그렇습니다.

우린 경험으로 잘 알거든요.

친구와 저는 고교시절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해 ‘범생이’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큰 문제도 없었습니다.

물론 고민이야 있었지요.

해서 일탈행동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불량기나 반항기가 가득했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구요.

우리가 다닌 학교는 교정을 온통 개나리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봄날이면 개나리꽃이 학교 전체의 울타리가 됩니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는 개나리 꽃밭으로 하나 둘 기어듭니다.

만개한 개나리꽃에 가려 밖에선 검은 색 교복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맛도 모르면서 담배를 뻐끔거렸습니다.

어느 날 첩보를 입수한 학생주임 선생님이 꽃밭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튀었습니다.

잡히면 끝장이니까요.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교실로 향했습니다.

다음 시간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수업이 시작된 얼마 후 이름이 불려지고 교무실로 호출을 당했습니다.

꽃밭에 있던 아홉 명 중 한 명이 붙잡혔던 겁니다.

학생주임 선생님의 심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말이 심문이지 실컷 두들겨 맞았던 겁니다.

불었답니다.

한 대에 한 명씩 이름을 댔다고 하더군요.

우린 그 친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하다 잡혀 동지를 팔아먹은 게 아니거든요.

각자 담임 선생님에게 인계된 후 우린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때 저는 대나무였지만 제 친구는 각목으로 타작을 당했지요.

친구 담임 선생님은 혈기방장한 젊은 교사였습니다.

별도 달았습니다.

일주일 정학.

매일 반성문을 쓰면서 재래식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반성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루 종일 함께하는 아홉 명이 다른 수작을 모의했거든요.

방과 후 허름한 중국집 골방에 모여 짬뽕국물에 고량주를 마셨습니다.

별 단 것을 과시라도 하듯 우리는 모자를 더 삐딱하게 썼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의 행동을 미화할 뜻은 없습니다.

당연히 잘못된 일이었으니까요.

솔직히 얻어터지고 정학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개나리 꽃밭에서 담배만 피웠던 것은 아닙니다.

나름 진지한 대화도 나눴었거든요.

국어선생님이 설명해준 어느 시인의 시에 대해서 말입니다.

“목가적이란 말 좋지 않냐. 국어선생님 되고 싶더라”

“그래. 참 좋더라. 공부 좀 해라. 아무나 선생님 되냐 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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