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법화의 집에 도착한 양녕은 우선 어리를 푹 쉬게 해주었다. 전 같으면 여자를 데려오자마자 이불 깔기에 바빴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좋은 먹이를 아끼는 맹수와 비슷했다.
해가 뉘엿해지자 양녕은 저녁 식사도 마다하고 어리를 깊숙한 뒷방으로 불러들였다.
방안에 들어선 어리는 양녕 옆으로 빗겨 서서 다소곳이 앉았다.
“나를 보고 바로 앉아라.”
양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가 마지못해 몸을 약간 돌려 앉았다. 어리는 옆모습도 아름다웠다. 나이가 꽤 들었으나 전혀 나이든 티가 나지 않았다. 양녕은 그동안 숱한 여자를 겪어 보았지만 어리만큼 음심을 돋우는 여자는 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일색이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오늘 밤 우리 밤새도록 한번 어우러져 보자.”
양녕이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어리 쪽으로 다가갔다.
“마마, 용서 하십시오. 저는 주인이 있는데다가 지금 몸이 성치 못해 마마를 모시기 어렵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보아라. 내가 한 방에 시원하게 고쳐주마.”
어리가 눈물까지 흘리며 위기를 피해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여자를 수없이 다뤄본 양녕인지라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어리의 단단한 결심은 무너지고 촛불이 꺼졌다. 가쁜 숨소리만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새벽녘이 가까워서야 방안이 잠잠해졌다.
아침에 일어난 어리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양녕이 선물로 준 오방주머니를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오방주머니란 오색 비단으로 만든 색주머니로 궁중 귀부인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양녕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하룻밤을 함께하면 꼭 오방주머니를 선물로 주었다.
어리가 양녕을 대하는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모신 지아비를 섬기듯 했다. 양녕 대군의 여자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하룻밤만 자고 나면 거부하던 여자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이튿날도 양녕은 어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고 있을 때에서야 양녕은 방문 밖으로 나왔다.
“오방이 거기 없느냐?”
양녕 이 눈만 뜨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이오방이었다.
“대군 마마 편히 주무셨습니까?”
이오방이 달려와서 양녕 앞에 서서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숨도 편히 못 잤다. 저런 미인을 품에 안고 어떻게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가 있겠느냐?”
양녕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전쟁 치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울렸습니다.”
“예끼 이놈!”
양녕은 겸연쩍은지 짤막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들어갈 차비를 하여라.”
“대궐로 행차하십니까?”
“물론이다. 어리도 같이 데려갈 테니 그렇게 준비하여라. 대낮에 대궐 들어가는 거야 뭐 어려울 게 있겠느냐?”
야밤에 여자를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어리를 대궐로 데리고 온 양녕은 며칠 동안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은 양녕의 거처 안팎은 물론이요, 궁중 내외에 퍼져나가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웠다. 의정부에까지 알려져 결국은 양녕이 어리와 함께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나중에 어리가 자살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 뒤 다시 궁으로 들어온 양녕은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모두 대군이 근신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좌군비 윤이 모녀를 궁궐로 잠입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