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유쾌한 당위의 세계에서... 연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윤진현 문화비평] 유쾌한 당위의 세계에서... 연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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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봉 원작, 진선영・정안나 각색, 정안나 연출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사진 ⓒ 극단 수수파보리 (C)권애진

 

유쾌하고 즐겁다. 김말봉 소설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3편을 엮어 일종의 만담극으로 꾸민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는 산울림소극장에서 기획하는 2022 산울림고전극장의 첫 번째 작품이다. 산울림고전극장도 벌써 10년 성상인데 올해는 ‘우리고전, 우리 문화의 힘’이라는 주제로 김말봉의 소설 3편을 엮은 작품, 나혜석의 <경희>, 현진건의 <까막잡기>, 남영로의 <옥루몽>, 이상의 <날개> 등 다섯 소설을 연극으로 준비하였다.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를 보고 나니 나머지 작품도 기대가 된다.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는 만들어진 과정도 재미있다. 이 작품은 2021년 중랑문화재단과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함께 제작한 프로젝트 ‘망우열전’에서 낭독극으로 처음 시작되었다. ‘망우열전’은 망우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작가 중 아동문학가 방정환, 시인 박인환, 영화감독 노필, 화가 이중섭, 소설가 김말봉을 대상으로 삼았다. 죽음의 장소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은 기획도 참신하고 협업이 쉽지만은 않은 법인데, 함께 재미있는 결과물을 내어서 더욱 반갑다.

김말봉은 1930년대부터 이름 높은 대중문학 작가였지만 정작 오늘날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작품을 보면 대단히 친숙한 대중적 화소가 흥미진진하다. 지적 엘리트의 계보로 구축하고자 했던 근대문학의 문사(文士)적 지향을 “순수 귀신을 버리라”고 용감하게 비판하면서 김말봉은 제도문학에서 다루기 어려운 진짜 막장의 현실을 대담하게 형상화하였다. 

김말봉 작품에서 비극적 영웅, 특별하고 비범한 존재조차 피할 수 없이 들이닥치는 운명적 상황에서 과연 어떤 선택과 결정이 가능한가에 대한 통찰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범한 영웅에게만 운명 같은 선택의 순간이 닥치라는 법이 없다.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공교로운 우연과 오해와 갈등과 편견과 미움, 그리고 이로 인해 멀어지는 진실과 점증하는 고통은 너무 흔해서 차라리 일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김말봉 작품은 어떤 사람이나 만날 수 있는 일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과 선택을 고찰한다.

사진 ⓒ 극단 수수파보리 (C)권애진

 

사실 이는 소설적이기보다는 극적 주제에 어울린다. 근대소설은 인물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통해 발견하기 어려운 깊은 인간 내면의 진실 탐구를 본령으로 삼는다. 이러한 미적 기준으로 본다면 김말봉의 소설은 분명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인물 간 갈등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역동적인 상황, 평범한 인물과 이들의 문제와 대응은 근대 이후의 시민극적 주제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 인간 자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갈등 속에서 선택과 실천을 질문하는 극적 형식에 김말봉이 그려보이는 세계는 소설보다 더욱 다채롭고 중층적인 진실의 결을 드러낸다고도 하겠다. 김말봉의 작품을 한류 드라마의 원조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이번에 엮은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세 작품은 발표순서이기도 하지만 갈등을 대하는 보통 사람의 태도를 단계별로 보여준다. <고행>은 아내 몰래 다른 여성을 만나는 남자가 발각될 위기를 겪는 내용이다. 남편이나 연인이 다른 이성과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은 아내인데, 이 사람은 정작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때로 일상에서 모르는 것은 약이다. 부정한 행위는 그러한 행위 자체로 저지르는 자를 벌하기 마련이다. 

<찔레꽃>은 1937년 3월 31일부터 10월 3일까지 총 129회에 걸쳐 연재된 장편소설인데 오늘날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 화소를 모두 실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의 근원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문제와 그 틈새를 파고드는 집요한 정욕과 탐욕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인간다움을 지킬 것인가? 정순은 자신을 불신하고 결국은 배신에 이른 약혼자 민수의 참회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되찾고 승리하는 대신 놀랍게도 ‘고통의 축소’라는 성숙한 선택을 보여준다. 

“민수 씨! 이미 한 여자를 울렸으니 또다시 한 여자를 울리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두 분은 이미 약혼을 하셨으니 행복하시기만 빕니다.”

자신의 고통은 이미 발생한 것이다. 민수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 고통을 이기고 다시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그럴 경우, 민수와 약혼한 경애의 고통이 새로 발생한다. 고통의 총량을 고려하며 경애와 민수의 행복을 빌어주는 이 고귀한 선택은 오늘날에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도덕적인 결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깊이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평범한 인간은 과도한 탐욕 따위는 품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고 더 심한 고통이 추가로 발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이렇게 인간으로 최선을 다해도 늘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인간이길 포기하고 잘못을 따져도 반성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화려한 지옥>에서 송희는 이를 응징한다. 물론 응징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진다.

김말봉의 소설을 ‘통속소설’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사용된 ‘통속’이란 단어는 다소 경멸적인 뉘앙스와 저급한 하위문화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통속(通俗)’이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 두루 통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그것이 대단히 숭고한 미적 차원으로 고양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여기에서 우리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질문하고 해결하는 데는 당연히 유용한 형식이다. 

사진 ⓒ 극단 수수파보리 (C)권애진
사진 ⓒ 극단 수수파보리 (C)권애진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그래서 더욱 유쾌하다. 뭐가 어떻긴, 유쾌하고 단호하다. 김말봉 문학에 흐르는 일관된 가치를 세 작품으로 엮어낸 각색도 좋았거니와 1930년대의 문화적 분위기를 양념 삼아 유쾌하게 풀어낸 극단 수수파보리의 구성과 연기도 좋았다. 굳이 한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자면, 이 ‘통속’의 가치를 호기롭게 제기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망했으면 싶다. 

마음 변한 연인/남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에는 간단한 대답이 있다. 헤어지면 된다. 그러나 이 간단한 대답이 가능해진 것은 오랜 역사적 투쟁, 위대한 약자들의 투쟁 덕분이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숭고한 헌신은 물론이고 사랑을 지킬 수 없을 때도 인간다움을 함께 놓치지 않기 위한 눈물겨운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이 남성의 소유로 간주되는 세계에서 이러한 대답은 불가능하다.(물론 그 반대 문명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감정이 변화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존엄이 유지될 수 있다는 확신, 그러한 세상이어야만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복수가 통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에 폭력이 필수인 것은 아니다. 고통과 불행의 총량을 늘리는 선택이 지혜로울 수는 없다. 마음 변한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나보낸다는 결말은 너무도 교과서 같은, 너무나 당위론적인 결정이지만 현대 시민사회에 더 나은 가치를 제안할 수 있을까? 이 당위를 당위로 정립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왔던가?

말하자면 김말봉의 주인공들, <고행>의 아내, <찔레꽃>의 정순, <화려한 지옥>의 송희나 채옥은 더 높은 도덕적 결단을 실행함으로써 약자인 여성이 어떻게 존엄한 존재로서 고양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미적으로 개연성이 부족할지는 몰라도, 바로 이점이 사회적으로 관심과 인기를 누리며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제대로 조명하고 그 가치를 재발견, 재구축하여 이들 인물의 결단이 다시금 사회적 가치로 고양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순이나 송희, 채옥의 이름을, 김말봉의 이름을 우리는 잊었어도 이러한 인물의 역사는 장금이나 은탁이나 영우와 같은 인물이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통속’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이 작품이 더 즐겁고 재미있게 성장하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윤진현(Yun, Jinhyeon)

문학박사, 인하대 졸업
인하대 학술교수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윤진현 연극평론가는 지역문화 운동을 펼치는 문화혁명가이다.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드라마와 문화 콘텐츠를 지역의 역사와 접목시킨 '신화와 드라마, 극적 상상력으로 고전 다시 쓰기' 등의 강의를 해오고 있다. 인천 지역 사회에 감춰진 진주와도 같은 숨은 작가를 발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윤진현은 인하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이순신과 영웅의 쇄신> <김재철과 조선연극사> <애니메이션 삼국지의 종류와 변용> 등이 있다. 저서로는 <행복한 인천연극> <풍경, 함세덕> <조선 서민국의 구상과 탈 계몽의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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