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지금, 쇄신이 필요한 때...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윤진현 문화비평] 지금, 쇄신이 필요한 때...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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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J컬쳐

공연은 잠들어 있었던 그 어떤 부분을 일깨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던 기억이나 정보나 생각이나 느낌이 공연을 보면 되살아난다고 할 수 있겠다. 좋은 공연은 새로운 의욕과 관심과 표현의 욕구가 솟구친다. 이상하거나 낯선 것을 찾아보고 확인하게 만들고 새로운 공부를 하게 만들며 느낌과 깨달음을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별 것 없는 공연이라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경우에는 도대체 왜 그런 작품이 되었는지, 뭐라고 해야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연을 보는 데는 따로 요령이 없다. 지난 공연을 제대로 보았다고 이번 공연을 제대로 보리라는 보장도 없고 이번에 모호하고 불확실하다고 다음에도 그러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극단이나 배우만 달라져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고 극장이나 사회적 상황이 바뀌어도 다른 작품이 된다. 요컨대 공연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을 계속 깨어있게 만든다. 같은 작품조차 이렇게 계속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같은 작품이 10년 이상 계속 공연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우리 공연계에도 이미 롱런하는 작품이 여럿이다. 다른 나라처럼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작품을 두 번, 세 번 새로운 기획으로 공연하는 것도 롱런의 한 방법이다. 롱런한다고 무조건 좋은 작품이란 뜻은 아니지만 롱런의 기술이랄까? 자원을 끌어모아 상연을 가능케 하고 관객에게 새롭게 어필하는 홍보전략 등에도 창의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공연계의 기획방법은 나름 장점과 특별함이 있다. ‘k’를 붙여서 설명하는 트렌드에 따르면 ‘k-공연기획’이랄까? 별도의 통찰이 필요하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성실한 공연이다. 2014년에 초연되어 매해 공연을 확장해 왔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지방공연 등으로 호흡을 유지해 왔다. 햇수로만 따져도 벌써 9년이니 감회가 새롭다. 단순한 무대에 영상과 조화를 추구하며 아름다운 고흐의 그림을 함께 본다는 구상이 얼마나 참신한 것이었는지 근 10년 동안의 활약으로 입증된 셈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기록에 성실하다. 때로 프로그램북조차 허술한 작품을 만나곤 한다. 작품에 대한 자체 기록이 불성실한 경우도 있다. 대본 등 공연 자료를 볼 수 없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는 공연되는 순간이 지나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게 되는 동시성의 예술에서는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프로그램은 물론이요,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대본집, 실황OST와 실황DVD까지 공개하고 있다. 내용을 공개하면 집객에 불리하다는 왜곡된 관행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대담한 공개는 이 작품의 제작진이 작품에 대해 품고 있는 자긍심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또한 이 작품은 음악적으로도 비교적 쉽고 단순하다. 폄훼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할 빼어난 음악적 성취와 가창력을 선보이는 것이 무대로 보면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속성으로 보면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노력이나 훈련도 없이 아무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연이 제한된 특정인만 가능한 채로 그들에게만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이 작품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음역대, 가요풍의 창법과 가창력을 전제로 음악이 편성되었고 덕분에 다양한 배우의 다채로운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음악적으로 쉽지 않은 장엄, 숭고미의 영역을 포기하면서 서정성에 집중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고흐’의 삶을 수평적 관점에서 수월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다. 역시 현명한 선택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이 작품의 장수비결이다. 그러나 이제 이 장점들이 이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때가 되었다. 

사진 ⓒ HJ컬쳐

2014년 이 작품이 처음 선보였을 때, 고흐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중적 이해는 아마도 평범한 전기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때는 영화라고 해봤자 2010년 BBC에서 만든 다큐드라마 <Van Gogh : Painted with Words> 정도가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매우 좋은 작품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열연이 돋보이는 데다 이 작품에 사용된 텍스트는 모두 고흐의 편지에서 따왔기 때문에 고흐를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미와 예술성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다큐드라마란 그 자체가 극적이기보다는 서사적이기 때문에 극적 재미를 누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고흐를 다룬 아름다운 영화가 2017년, 2018년 연이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 개봉된 <Loving Vincent>는 획기적이다. 125명의 화가가 참여하여 10년 간에 걸쳐 고흐의 화풍을 재현한 전무후무한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전하기 위해 집배원의 아들이 고흐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한다는 간단한 스토리이지만 여기에는 그에 대한 이해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 그 주변의 인간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초상이 반영되어 있다. 넘치는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으로 작업한 빈센트 반 고흐에게 끝내 결핍되었던 것이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해와 사랑이었음을 절절히 느끼게 만드는 영화이다. 2018년 개봉된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우리에게 <스파이더맨>의 ‘그린 고블린’으로 잘 알려진 윌렘 대포(Willem Dafoe)가 주연을 맡았고 그는 이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고흐가 왜 새로운 예술가이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윌렘 대포의 열연은 정말 대단해서 새삼 그의 필모를 추적하며 감탄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Loving Vincent>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적대하는 우리의 일상적 태도를 반성하게 했다면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누구의 이해나 관심과 무관하게 스스로 바라보는 세계의 진실을 과연 끝없이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의 정의(正義)와 소명(召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이제 이러한 작품과 경쟁하며 동시에 비교되는 시점에 도달했다. 이것이 시너지를 낼 것인가는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쇄신에 달려있다.

참신한 시도였던 고흐의 그림을 활용한 영상은 이제 식상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느껴진다. 사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관람객의 능동적 시간을 통해서이다. 영상으로 지나가는 그림이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최적의 방법일 수는 없다. 또한 고흐의 일대기를 다루는 작품의 전개는 얼마간 지루하고 장황하기까지 하다. 사람들과 원만히 어울리지 못했고 특이한 세계관을 지녔다는 사실 자체가 고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이랄 수는 없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작품이 언제 초연되었는가, 무엇이 먼저 등장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나 다큐에 비해 뮤지컬은 어떤 다른 점, 어떤 특별한 점에 주목하고 있는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고흐’라는 인물,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의 생전에 그림을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는 비운의 화가라는 점 외에 ‘고흐’의 어떤 점을 보여줄 것인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자신의 기반을 넘어서는 쇄신이 요구될 때가 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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