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대역과 대체 가능... 박소영 연출 '쇼맨'
[윤진현 문화비평] 대역과 대체 가능... 박소영 연출 '쇼맨'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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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립정동극장

 

‘대역’이란 근본적으로 불온하다. 기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상상은 은폐된 욕망을 드러내고 문제해결을 촉구한다. 그래서 ‘대역’ 또는 ‘가짜’, ‘역할 바꿈’을 오브제로 삼는 작품들은 대체로 흥미로우나 부득이한 시작에 유쾌한 해피엔딩을 결합하여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미적 전략을 구사한다. 이는 대역이 내포한 기만을 일시적인 것으로, 다른 존재가 된 특별한 경험을 극적 장치 내에 한정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낭만적 결말로 부도덕성을 완화하려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아이번 라이트먼 감독의 정치코미디 영화 <데이브> 같은 작품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무지하거나 부패한 권력자의 대역을 맡았던 평범한 존재들이 부당한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 뮤지컬 <쇼맨>은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은 고전적인 의미의 역할 바꿈이 해소되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으면서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대역’으로 살았던, 혹은 대역으로 사느라 자기 존재를 찾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익히 알려진 화소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극적 기교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유용하다. 한정석 작, 박소영 연출, 음악감독 이선영은 전작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 등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온 팀으로서 인상적으로 주제를 드러내고 캐릭터를 구축한다. 특히 <쇼맨>의 두 인물, 네불라와 수아는 참신하면서도 문제적이다.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쇼맨’인 ‘네불라’는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이었다. 독재자를 대신하려면 첫 번째, 두 번째도 쉽지 않을 것인데, 네 번째라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쇼맨>에서 첫 번째, 두 번째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머리가 좋은 자들이어서 기본적으로 권력을 분담하는 존재에 가까워 독재가 무너질 때, 독재자와 운명을 같이하였고 세 번째는 교통사고로 처리되었으나 네 번째 대역이었던 네불라는 운좋게 살아남아 조력자로서 법적 처벌을 받는다.

그렇지만 흉내내기를 잘하는 재주꾼으로 시작한 네불라가 배우로서 계속 모방에 머물며 성공하지 못하고 독재자의 대역을 하게 된다는 설정은 사실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하다. 현실성이야 네 번째 대역이라는 가정된 상황 자체도 그다지 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이는 드라마를 이끌어가기 위한 설정이니 차치한다. 

사진 ⓒ 국립정동극장
사진 ⓒ 국립정동극장

 

캐릭터의 현실성이란 인물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그 자체로 개연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기 연기를 키우지 못하고 모방에 그쳐 배우로서 단명하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배우의 영역은 광대하다. 만약 네불라처럼 모방을 잘해내는 배우라면 오히려 이를 특기로 삼아 자기 연기를 구축할 수도 있고 더 많은 경우에는 모방에서 시작해도 자연스레 자신의 관점을 정립해가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독재자의 대역으로 가는 과정은 불필요하게 구구하고 ‘네불라’라는 캐릭터를 비현실적으로 미흡하게 만든다. 

이 점을 문제 삼는 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 ‘네불라’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관객이 부당하게 ‘네불라’를 배우로서 함량미달이라 판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덕하거나 또는 악의에 동참하거나 기여하는 것은 부족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관객과의 관계에서 캐릭터를 우열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신중해야 할 일이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잡다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던 네불라는 어느 날, 유원지에서 한국계 입양아인 수아를 만난다. 네불라는 수아를 사진가로 오해하고 자신을 위한 촬영을 요청한다. 수아는 사진에 문외한이었지만 실속있는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이를 수락한다.

수아는 장애가 있는 동생 제인을 돌볼 사람으로 입양되었다. 잠시 동생을 혼자 두어 사고가 생기자 양부는 수아를 비난한다. 늘 착하게 동생을 돌보며 최선을 다했던 수아는 다만 베이비시터였을 뿐, 가족으로서 자신의 자리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양부의 집을 떠난다. 마트에서 일하던 중, 마트 매니저 일레인 자리가 비게 되어 수아는 이 자리에 지원하고자 한다. 동료 추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아는 동료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매니저 활동계획을 작성한다. 그러나 점장은 수아에게 잠시 일레인의 빈 자리를 대체하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사진 ⓒ 국립정동극장
사진 ⓒ 국립정동극장

 

대체 가능한 존재로서 자신만의 위치를 갖지 못한 수아는 독재자의 대역으로 자기 삶을 살지 못했던 네불라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오리지널리티(Originallity)를 갖고 싶어한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사회에서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나에게만 부여된 존재적인 의미와 가치는 얼마나 빛나는 것인가. 누구나 이를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특정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한 사람이 없어지니 가족이 붕괴되고 한 사람이 없어서 회사가 망하고 사회가 마비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현대 사회는 그래서 극단적으로 대체 가능한 방식으로 조직을 발전시켜 왔다. 물론 그러다보니 언제나 작은 부속품처럼 인간을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심각한 부작용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자원으로 취급하는 것은 소탐대실, 위험한 어리석음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리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자리라는 사실이 아니고 수아가 동생을 돌보았으며 동생을 구해냈다는 사실이다. 수아의 양부가 수아를 베이비시터 취급을 했더라도 그것은 양부의 파렴치일 뿐, 수아가 동생을 진심으로 돌보았으며 자매로서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치 않는 위치를 떠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스스로 이룬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수아는 네불라를 위로하고 동생과 재회하며 자신이 이루어온 삶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대단히 다행스럽다. 대역에서 대체 가능한 삶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이것을 젊은 수아의 성장으로 이어간 것에 이 작품의 득의가 있다. 이 점이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바, 부디 뻔한 가족 회복의 서사나 단순한 과거 긍정의 서사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쇼맨 네불라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고 문제적이다. 이 문제는 대역과 대체 가능한 현실적 삶의 역할을 혼동한 데서 시작되었다. 문제의 혼동은 잘못된 해결로 이어진다. 유사한 상황이라고 해도 정확하게 인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지나 스스로 도착한 현재는 언제나 진짜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심지어 곧 포기하고 버릴 것이라고 해도 그 실재성은 분명하다. 네불라는 ‘끝이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 너무 소중했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도 있으나 그것은 네불라 개인의 문제이며 이에 대해 사회적 이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네불라의 문제는 스스로 옳지 않은 일에 자신의 재능과 시간과 삶을 소비했고 이에 대해 가혹한 신체 퍼포먼스로 반성했으면서도 끝내 그 미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과거의 잘못을 모두 알면서도 이를 잊지 못하고 소중하게 미화하는 소름끼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따뜻하고도 겸손한 이 독특한 문제적 인물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더구나 수아의 이해, 즉 새로운 세대의 이해와 공감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해란 수용이다. 인간을 조종하는 사악한 권력의 작동방식이 그렇게 이어져도 좋을 것인가? 수아가 네불라의 방법을 배우기 시작되었으니 이 위험한 온정의 향방은 어찌될 것인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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