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원수를 왜 사랑하나?... 오경택 연출 '라스트세션'
[윤진현 문화비평] 원수를 왜 사랑하나?... 오경택 연출 '라스트세션'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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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파크컴퍼니

극적 ‘갈등’이란 한정된 공간 내에서 대립하는 두 개 이상의 의견, 태도, 사상 따위를 기반으로 할 때, 극대화된다. 감옥, 외딴 산속마을이나 고립된 섬마을 따위의 숨어 있는 공간이든 갇혀있는 공간이든 밀폐되고 한정된 공간은 갈등을 크게 증폭한다. 여기에 목숨이 걸린 내기를 하는 인물들, 정반대의 성격이나 성장배경 등 그것이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대립된 자질이 충돌할 때, ‘갈등’은 더욱 커지고 극적 긴장은 더욱 강화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폭격 경보가 울리고 있는 런던, 무신론자 프로이트(Sigismund Schlomo Freud)와 유신론자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대면한다. 유/무의 대립은 중간지대가 없다. 더욱이 신(神)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극단적인 의견 대립,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사진 ⓒ 파크컴퍼니
사진 ⓒ 파크컴퍼니

초연 때부터 참여했던 신구 선생과 이상윤 외에 최근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크게 주목받은 오영수 선생과 전박찬이 추가로 합류하여 2주의 연장 공연을 소화하며 3개월에 걸쳐 공연된 연극 <라스트세션>이 폐막되었다. 3월에 신구 선생이 입원하는 등 건강이 염려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역량 있는 원로 배우와 야심찬 젊은 배우의 연기 대결은 관객으로서는 호사스럽다 싶을 만큼 특별하였다. 

그럼에도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신의 유무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는 설정이 매양 쉬운 것은 아니다. 폭격에 대비한 경보 사이렌이 있을 뿐, 신체행동도 적고 서로에게 예절 바른 두 사람이 대면하여 관객 대중이 관찰 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토론 중심의 이 작품은 생각처럼 분명하거나 치열하지 않다. 무엇보다 토론이 있었으되 그 결과로 등장인물 누구도 의견이 변화하거나 새로운 결단에 이르지 않는다. 나치를 피해 망명한 프로이트가 망명지에서 구강암으로 사망하면서 젊은 루이스와 토론하는 것으로 정신분석학자로서 어떻게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한 인간의 생애를 이해할 때, 임박한 죽음과 고통스러운 투병은 중대한 전기(轉機)가 되기 쉽다. 목숨이 오가는 큰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180도 변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도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죽음에 임해서도 신을 부정하는 자신의 판단에 확고했다. 더구나 젊고 지성(至性)스러운 청년 신앙인의 위로 앞에서도 의연하였다. 이 작품에서 신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지적 대결보다 프로이트의 ‘세션’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몸은 몹시 아픈데 바깥에는 포성까지 울린다. 한없이 나약해지는 순간, 함께 있는 것은 성실하고 반듯하고 믿음 깊은 청년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두려움과 고통을 함께 해준다. 이 순간, 프로이트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죽음 너머를 신에게 가탁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무척 자연스럽다. 위기를 함께하는 귀한 존재의 간절한 문제제기를 물리치는 것이 오히려 어렵지 않을까. 

어쩌면 죽음에 직면하여 평생 견지해 온 학문적 입장을 철회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임종 순간의 의례적인 종교 귀의 절차마저 거부하는 철저한 태도, 자신의 학문적 판단에 부여하는 부동의 신뢰에 동의 여부를 떠나 더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  

‘무신론’은 신(神)이 지상 위, 하늘 어딘가에 거처하고 있다고 상상하던 전근대 기독교의 위계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부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망원경으로 하늘을 살펴보았으나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비논리적인 신비의 영역, 인간의 무의식까지도 근대 이성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게 되면서 ‘신이 없다’는 이 획기적인 사유는 더욱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던 인간 이성의 절대적 권위는 이미 부정되고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신(神)’이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불가지한 세계를 수용하면서 그에 대한 공포를 넘어 인간과 생명에 대한 능동적인 존중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고 인정할 때, 이러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옳고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실천하고 싶다고 의지를 다지는 한 방법이다.

사진 ⓒ 파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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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이 있느냐/없느냐’라는 확인 불가능한 질문을 놓고 토론하거나 투쟁하고 나아가 전쟁까지 벌이는 것은 때로 핑계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한국에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와 토론은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20세기 서구 사회는 기독교 신앙이 사실상 전부였지만 한국 사회는 21세기 오늘까지도 다신교 사회이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도 ‘오늘의 운세’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고 기독교인을 자부하면서 점술이나 무속적 예언을 적극적으로 찾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시대 최고의 한국학자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조동일 교수는 한국인 공통의 내면적 기반을 ‘무속’에서 찾았고 외래에서 도입되었거나 19세기 이후 새롭게 축조된 사상이나 종교가 빈번히 무속화되는 다양한 경우를 열거한 바 있다. 무속과 기독교, 무속과 공산주의, 무속과 동학 등 무속과 습합된 신흥종교, 사상과 이념의 사례들에는 확실히 타당한 점이 있다. 요컨대 전(前) 시대는 물론이요,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무신론자의 비중은 낮다. 토론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여 연극 <라스트세션>에서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벌이는 신의 유무를 둘러싼 논쟁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객석에서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끌어낸 순간은 기독교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이 구절은 사랑을 교의의 핵심으로 삼는 기독교에서 사랑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으로 보아도 좋다. 관객들은 이 순간 프로이트의 조소에 동조하며 프로이트와 한 통속이 되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원수를 사랑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사랑보다는 협박이나 공포를 조장한다. 불신하면 지옥 간다, 불신하는 무리는 다 죽여도 된다는 말은 아주 자주 들었고 심지어 쓸모없는 늙은 여자들이 앞장서서 죽을 각오를 하고 북침하여 한 명씩 죽이고 죽자는 선동까지 들어봤다.

전쟁이 난다면 무고한 젊은이, 어린이들이 희생되느니 나를 포함하여 전쟁 발생에 책임이 더 큰 기성세대가 책임지고 목숨을 내놓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오래 해왔지만 그것이 쓸모없는 늙은 여자로 수렴될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카미카제가 되어서 가서 생명을 죽이고 죽으라고 권하는 기독교인이 있는 판이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교리가 비웃음을 산다고 해도 억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언명의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서 이 구절을 기억하는 것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보통 경전을 신이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기록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모든 종교적 경전은 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경험한 자들의 고백이다. 즉 사람이 쓴 것이다. 마태복음이라는 경전은 ‘마태’라는 사람이 썼다고 알려진 예수의 행적이며 예수 사후 50년 이상 경과한 서기 80년 경 씌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맞선 유대의 저항이 폭발한 유대-로마 전쟁이 최종적으로 유대의 패배로 끝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다음이었다. 당시 신흥종교로서 유대교에서 이탈하며 세계종교로 성장하고 있던 기독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과 신앙의 공동체가 건설되며 삶을 복구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유대 측에서 참전한 이들과 로마군에 징발되어 로마 측에서 참전했던 자들이 같은 하늘 아래 살아야 했다. 내 가족과 이웃을 죽인 자들과 같은 신을 섬기며 한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사진 ⓒ 파크컴퍼니
사진 ⓒ 파크컴퍼니

폭력이란 본질적으로 눈덩이와 같다. 폭력은 처음에는 1로 시작해도 보복할 때는 2, 4, 8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폭력으로 폭력을 중단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이라는 구약의 교리는 폭력을 등가로 제한하여 더 큰 폭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애썼던 것이지만 폭력을 근본적으로 중단하지는 못했다. 

부모 죽인 원수를 갚는 것이 응당한 의무라 해도 서기 80년 유대 사회에서 이것이 시작된다면, 유대-로마 전쟁의 후유증은 유대 내전으로 전화될 수 있었다. 로마-유대 전쟁에서 패배하고 수많은 유대인이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유대인끼리 싸우는 동족상잔을 저지르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부모를 죽인 원수와 이웃이 되어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는 이웃을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요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종교적 믿음과 별개로, 신의 유무에 대한 개인적 신념과 별개로 이러한 비폭력적 삶의 태도가 우스개, 조롱거리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무신론자 프로이트와 유신론자 루이스의 토론과 논쟁보다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고 위로하던 태도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에서 전쟁 소식이 들리고 무력분쟁의 조짐이 눈에 띄는 요즘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더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끝없이 사유되고 실천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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