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위대한 인간을 읽는 방법... 연극 '템플'
[윤진현 문화비평] 위대한 인간을 읽는 방법... 연극 '템플'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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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위대한 인간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동기를 부여하며 생각과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다. 어떤 면이 다른 이들에게 감동과 영향을 주는가? 당연히 인물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여기 한 명의 위대한 인간 템플 그랜딘이 있다. 그녀는 자폐인이다. 자폐인에 대한 세상의 무지와 편견과 조롱과 가학행위를 넘어서 용기 있게 자신이 두려워했던 세상을 향해 나아갔으며 탁월한 동물학자로서 가축들의 삶을 개선하고 자폐인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넓혔으며 그로써 인간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데 기여하였다.

자, 연극 <템플>이 있다. 템플의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이다. 따라서 템플을 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소재 자체의 강점이 있다. 관객들은 템플이란 인간을 알게 되자마자 감동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연극이 여기에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연극 무대에서 템플 그랜딘의 전모를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은 템플의 생애 중에 어떤 점에 집중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극단 간다의 연극 <템플>은 템플과 템플의 어머니 외에 6명의 앙상블이 필요한 여러 배역을 소화하고 집단적으로 각종 오브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신체연극(physical theater)을 표방하는 극단 간다의 표현력은 낯설고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는 템플을 보여주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전체적으로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적절한 유머와 코믹한 표현도 비교적 적절했다고 판단된다. 

특히 템플이 ‘그림’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과 스승 칼락과 소통하며 ‘기적’이란 단어를 이해하는 과정을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장면이나 알파벳 문자를 설명하는 장면 등은 매우 유쾌했다. 사람과의 포옹을 싫어하는 템플이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소를 진정시키는 소틀을 응용하여 만든 ‘압박기계’를 보여주는 장면은 적절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들은 충분히 자폐인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템플 배역은 지나치게 소리치며 대사를 한다. 이것이 관객들에게 배우의 열연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자폐인의 표현방식을 전체적으로 알고 보면 시끄럽고 과장된 연기에 불과하다. 과도한 샤우팅 발성 때문에 호흡이 부족하여 헉헉거리며 연기하는 것도 보기가 좋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는 자폐인의 표현방식에 대한 과도한 편견이며 관객에게 자폐인에 대해 또 하나 왜곡된 정보를 발신하는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자폐인들은 보통 소음에 민감하고 정도 이상으로 큰 소리에 대부분 사람보다 훨씬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에도 자폐인들이 보통 사람보다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해야만 하는 순간이 보통 주변과 갈등할 때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 혹은 소위 정상인도 타인과 갈등하며 고통스러울 때는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친다. 자폐인은 자신이 고통스러울 때에 한정하여 비명을 지르지만 소위 정상인들은 타인을 괴롭히거나 조종하기 위해서도 큰 소리를 친다. 굳이 자폐인이어서 항상 고함을 치는 듯이 대사를 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시종 템플의 대사를 불필요한 샤우팅 발성으로 동시에 정확한 발음이라기보다 과하게 후설모음화 하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도 또한 언어적 편견과 차별을 유발할 수 있다. 

더욱이 템플을 괴롭히는 가학행위의 수위는 한참 지나치다. 실화라고는 해도 가학행위, 혐오행위의 재현은 신중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 행위를 꼭 보고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청소년기 2차 성징기의 혼란은 템플이 꼭 자폐인이어서 겪는 것이 아니다. 굳이 템플이 겪은 수많은 곤경 중에 해당 에피소드로 성적 모욕감까지 재현할 필요가 과연 있었던 것일까. 템플의 생애에서 주변의 몰이해와 편견으로 인한 고통과 이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해도 전체 연극의 거의 2/3에 달하는 시간을 할애한 것도 과하다. 극적 전개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한자성어는 언제나 참조할 만하다.

더구나 이 연극에서 관객은 템플보다는 템플의 주변에 더 많이 공감하고 동일시할 가능성이 있다. 자폐에 대해 무지하고 차이를 비정상으로 이해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꼭 필요한 시간과 요령을 갖지 못했던 관객은 이 연극을 통해 템플의 위대함에 박수를 보내면서 동시에 자폐가 병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템플은 성장과정, 수업시절 기간, 엄청난 몰이해와 적극적인 방해에 직면하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템플의 생각이 지닌 합리성과 유용성을 이해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 중 대다수는 템플의 노력을 목도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변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변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날 가능성이 높은 자폐인은 템플과 같은 서번트(savant)가 아니기 때문이다. 템플은 1/2000 가능성으로 출현하는 서번트로 판단된다. 자폐증 등 발달장애와 지적장애 등 뇌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암기·계산·음악·미술·기계수리 등의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때 서번트라고 한다. 템플이나 영화 <레인맨>의 레이몬드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고작 1/2000일 뿐이다. 

사진 ⓒ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사진 ⓒ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템플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 템플이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폐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특별한 능력이 없더라도 자폐인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 그들에 의해 한정되는 가혹하고 무지한 행위를 재현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의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추동하는 방향이 중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인물의 삶을 우리가 음미하는 것은 위대한 인물을 칭송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대한 성과가 예외없이 평범한 보통 존재들의 삶을 사랑하고 개선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다. 템플이 설계한 축산기계는 그녀가 사랑한 동물과 생명존중의 정신의 결과이다. 우리가 저마다 축산기계를 발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처럼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사랑하기를 배울 수 있고 자폐인이 모두가 템플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자폐인의 세계를 존중하고 시간과 노력을 더하여 더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지 않은가.

물론 연극 <템플>은 좋은 공연이다. 이미 수차례 공연이 되었고 앞으로도 또 공연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작품을 고쳐가며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연극이란 장르의 진짜 장점이다. 앞으로 더 좋은 공연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템플 그랜딘에 대해서는 여러 종의 저서가 발간되어 있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양철북, 2005)는 연극 속에서도 소개된 그랜딘의 저서인데 잘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다. <어느 자폐인 이야기>(김영사, 1997)는 스테디셀러로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자폐인의 내면을 제대로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고 논픽션 작가인 사이 몽고메리(공경희 역)의 <템플 그랜든>(작은길/2012)은 각종 이미지 자료를 싣고 있어 더 쉽게 템플을 이해할 수 있다. 2010년 믹 잭슨 감독의 영화 <템플 그랜딘>도 볼 만하다. TV영화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자폐인이 아니어도 대단한 학자지만 자폐인으로서의 능력으로 더 위대해진 템플 그랜딘 덕분에 다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넓어지고 우리는 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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