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보답 받지 못한 기대를 위하여... 장유정 각색‧연출 '더 드레서'
[윤진현 문화비평] 보답 받지 못한 기대를 위하여... 장유정 각색‧연출 '더 드레서'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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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이고 빼어난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질문할 겨를도 없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평론가에게 이러한 무방비한 매혹이 당연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좋은 작품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얼마든지 계속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 대표이며 주연 배우인 ‘선생님’(Sir, 송승환 분)과 그의 의상담당(dresser, 오만석‧김다현 분) ‘노먼’의 스토리 <더 드레서>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워낙 이 작품은 배우를 위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배우, 그것도 빼어난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유명하면서 동시에 탁월한 연기력을 갖춘, 구체적인 이름 없이 ‘선생님(Sir)’이라고만 호칭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 그대로 대배우가 등장한다. 송승환은 알버트 피니나 안소니 홉킨스에 견주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무게로 ‘선생님’을 소화했고 오만석은 성격배우로 쌓아온 명성에 걸맞은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즐겁고 빛이 났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런던, 독일군의 폭격으로 건물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도 하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을 시리즈로 공연 중이다. 그러나 극단 대표이며 주연배우 선생님은 ‘리어왕’의 공연을 앞두고 이상행동을 보인다. 거리를 헤매며 옷을 벗어 던지고 모자를 짓밟기도 하고 맥락없이 조각난 대사의 파편을 외쳐대며 무대에서 도망치려 한다. 코델리아 배역의 여배우이며 선생님의 아내인 사모님과 무대감독 맷지는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병원에 있던 선생님이 극적으로 나타나고 노먼은 공연 준비에 자신감을 보인다. 이들은 공연을 성공할 수 있을까?

노먼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노먼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선생님이 대사를 떠올리도록 애써 가며 분장을 돕고 의상을 갖춘다. 그 와중에 주요 스탭에 공백이 생기고 단원들의 호흡과 연대도 엉망이지만 겨우 막이 오른다. 노먼은 안내 스탭, 팀파니 주자, 무대효과 등 일인다역으로 동분서주, 무대 뒤는 바깥의 전쟁상태에 견줄 만큼 난리통이다. 선생님의 리어왕은 유난히 열정적이고 감동적이다. 두말할 것 없이 공연은 대성공! 무대 위에서는 리어왕의 비극이 처절한데, 무대 뒤의 난리통은 박장대소 코미디,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선생님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선생님은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 마지막을 피하려고 거리를 헤매고 무대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끝이 아니다. 진정한 반전은 선생님의 사후에 발생한다. 겨우 집필해 둔 선생님의 자서전 서문에는 여러 스탭에 대한 감사가 가득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드레서 노먼과 무대감독 맷지의 이름이 없다. 마지막 순간, 이 무슨 배신이란 말인가! 노먼은 분노한다. 노먼이 공연을 위해 선생님을 어떻게 보살폈는지 번연히 알고 있는 관객에게도 청천벽력이다. 

선생님은 왜 노먼과 맷지를 감사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일까?

쉬운 답변은 너무 가까워 잊은 경우이다. 노먼과 맷지는 부인보다도 더 오래 선생님의 연극 평생을 함께한 이들이다. 이들과 선생님의 연극 인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으니 동일시 될 만큼 가까운 존재를 잊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연극에서 단순 망각을 극 행동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은 선생님은 노먼에게 의지하면서도 노먼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맷지의 경우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짝사랑해 왔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체 해왔다. 심지어 더 오래 자신을 사랑해온 맷지의 마음을 알면서도 맷지를 무대감독으로 두고 현재의 부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남녀의 마음이란 일방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고 이 작품의 제목이 ‘무대감독’은 아니니 일단은 접어두자. 다만 선생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소리쳐 노먼을 찾고 아끼던 반지를 맷지에게 남기려 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는 확실히 깊은 신뢰와 우정이 있다.

인생에서 기대만큼 보답 받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같은 비중으로 선의로 한 나의 행동이, 나의 본의와는 다르게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방이 원치 않는 일을 강제하는 경우도 많다. 생각해보면 대배우 선생님이지만 평생 한결같이 연극을 하는 것이 힘들 때도,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먼과 맷지는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자신을 보좌하며 끝내 무대에서 생을 끝내도록 만들었다. 한편으로 영예롭고 배우다운 삶의 종말이라고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편안히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평화롭게 와석종신(臥席終身)하고 싶은 것도 역시 소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유야 어쨌든 노먼과 맷지로서는 억울하고 속상한 것이 당연하다. 그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공연을 성공하고 잠들 듯이 떠났으니 선생님의 인생에 특별한 회한이라 할 것은 없겠지만 남은 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울부짖으며 원망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선생님이 살아있을 때, 미리미리 대화도 나누고 확인하면 좋았을 일이지만 돌아가신 다음이라고 좌절하며 손 놓고 있을 것인가. 

남은 자들은 스스로 합당한 인사를 고인과 나누어도 좋다. 노먼은 감사인사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적어 넣고, 맷지는 사양했던 선생님의 반지를 스스로 챙겨간다. 그런 짓을 해도 좋으냐고 할 수 있지만 노먼은 감옥에 간다고 해도 좋은 말만 하지는 않겠다고 맹세한 터에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고인이 된 선생님을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들의 몫을 챙겼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내거나 구차한 원망을 늘어놓은들 무슨 소용인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내가 알아주면 될 것을! 

로널드 하우드(Ronald Harwood) 원작의 <The Dresser>는 1983년과 2016년, 두 번이나 영화로 제작되었다. 톰 커트니와 알버트 피니가 출연한 피터 예이츠 감독의 1983년 영화는 작중 ‘Sir’의 기행과 극단의 이동 등 대사로 보고되는 줄거리가 프롤로그에서 소개되며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뉴스와 시가지 장면으로 보여주어 좀 더 수월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유명 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이안 맥캘런이 등장한 2016년 리처드 에어 감독의 작품은 두 배우가 함께 늙어가며 오랜 세월 연극을 만들어 온 이력을 느낄 수 있고 ‘선생님’과 ‘노먼’이 사제간이 아니라 인생의 협력자로 형상화 되어 그 여운이 더욱 진하고 묵직하다. 1월 1일이면 끝나는 연극 <더 드레서> 이후에는 이들 영화로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상연을 기다려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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