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이만기와 2승1패...선수 때보다 지도자 더 유명
슬럼프 겪을 때 마다 '긍정의 힘' 통해 인생 뒤집기 성공
씨름선수 이승삼.
이승삼은 1980년대 ‘털보 장사’로 이름을 떨쳤다. 한라급에서 활약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턱수염 못지않게 기술씨름으로 유명했다. 가장 화려한 씨름 기술인 '뒤집기'의 달인으로 불렸다. 상대방의 몸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번개 같은 뒤집기가 상징이었다. 자기보다 큰 선수들을 거꾸러뜨렸다. 힘의 씨름보다 기술 씨름을 구사해 관객들에 탄생을 불러 모았다. 그는 1991년 현역 은퇴 후 줄곧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천하장사 정경진 선수 등을 키웠다. 2020년 KBS 예능프로그램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에 TV 해설가로 출연해 씨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마산을 찾았다. 마산역에 내리자 바다의 비린내가 늦가을 찬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이 감독은 시간을 맞춰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는 젊은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만큼 반가웠다. 그는 요즘 사진에 폭 빠졌다고 한다. 마산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마산은 이 감독을 비롯해 천하장사 이만기, 1790년대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를 8연패한 김성률 장사 등 수많은 씨름 스타를 배출한 고장이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Q: 이승삼은 어떤 인물인가.
이승삼: 보통 사람이다. 씨름을 했고 체육지도자였다. 현재의 삶에 충실한다. 1980년 대학 때 씨름에 입문했다. 당시 씨름 선수들에 비해 신장이 작았다. 김성주 감독께서는 작은 신장을 이용한 뒤집기를 전수해 줬다. 씨름의 뒤집기는 수비에 최적화된 기술이다. 뒤집기를 나 만의 씨름 기술로 만들었다. 이 뒤집기 기술로 대학부 천하장사에 등극했다. 1983년 일양약품 소속 이종식 선수를 뒤집기 한판을 하면서 씨름선수 이승삼이 알려졌다. 뒤집기 기술은 자유형 레슬링에도 있다. 씨름의 뒤집기가 자유형 레슬링보다 더 고급스러운 기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Q: 인생에 반전이 바로 뒤집기인 것 아닌가.
이승삼: 그렇다. 현역 때 뒤집기 달인으로 불리며 나 보다 신장이 큰 선수와 경기에서 상대방의 몸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번개 같은 뒤집기로 거꾸러뜨려 인기를 얻었다. 당시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등 백두급 장사들에게 번번이 막혀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채 1품만 차지한 채 현역을 마감했다. 한라장사 3회, 천하장사 1품 2회 성적표를 얻었다. 최고 실력이 좋을 때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천하장사 타이틀을 가지지 못해 아쉽다. 현역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천하장사를 키워내며 인생 반전을 일구어냈다. 인생은 노력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진다. 나는 매번 성실하게 인생을 써나가고 있다.
Q: 씨름 입문 계기는?
이승삼: 내가 초등학생 때는 프로 레슬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가 있었다. 김일, 장영철 선수의 시합 모습을 보면서 레슬링 선수에 꿈을 키웠다. 초등생 시절 우연히 씨름부 선수에게 패했다. 이것이 분해 도대체 씨름이 뭔가를 알고 싶어 시작했다. 마산은 씨름의 고장이다. 씨름은 우리나라의 전통 기예이다. 두 사람이 샅바나 띠 또는 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민속놀이이자 운동 경기이다. 시대에 따라 각저(角觝)·각력(角力)라고 불렀다.
씨름은 전통 레슬링(Wrestling)이다. 씨름은 샅바를 허리와 한쪽 허벅지에 두르고 2명의 선수가 상대의 샅바를 잡고 다양한 기술을 발휘하여 땅 바닥으로 쓰러트리는 경기이다. 서양의 씨름은 레슬링으로 발전했다. 상체만을 이용해 힘과 기술을 겨루는 그레코로만(Greco-Roman)형과 신체의 상 하체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자유(Free)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레슬링을 했던 나는 씨름을 시작한 이후 빠르게 기술을 배웠다. 상체만을 이용해 힘과 기술을 겨누는 그레코로만 기술을 뒤집기와 접목시켜 나만의 뒤집기를 완성시켜 대학 씨름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Q:씨름 선수로서 최정상에서 은퇴해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이승삼: 83년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8강전에서 이준희 장사와 시합도중 오른쪽 다리 인대가 중상을 입었다. 모래판의 갈림길에 섰다. 가족과 주위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 샅바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슬럼프를 겪는 동안에도 한 번도 실의에 빠진 적 없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이 나를 붙잡아줬다. 인생 뒤집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상당 기간 선수생활을 거친 뒤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Q:프로 씨름은 이만기 선수의 기술씨름과 강호동 선수의 힘 씨름으로 대비된다.
이승삼: 강호동 장사의 등장은 기술씨름에서 힘 씨름으로 전환 과정이다. 기술씨름은 다이내믹한 맛과 멋이 있다. 힘 씨름은 단조롭다. 힘의 씨름이 씨름판에 대세를 이루면서 씨름판이 외면을 받았다. 최근 바뀌고 있다. 씨름 체급은 네 단계다.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백두에서 한라, 금강, 태백으로 나뉜다. 전통적으로 씨름은 백두·한라급이 중심이다. 하지만 몸이 가벼워 경기가 더 빠르고 화려한 기술을 활용하는 태백·금강 급 경기에 대중들에 인기가 쏠리고 있다. 지난해 KBS의 <씨름의 희열>이 기술씨름에 인기에 기름을 부은 역할을 했다. 기술씨름을 보기 위해 여성 팬들이 씨름판을 찾았다. 이 열기가 그대로 창원 씨름대회로 이어졌다. 6,500석 되는 결정전 예매가 5분 만에 매진 마감되었다. 씨름계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씨름만이 해답이다. 다이내믹한 기술씨름이 모래판을 되살릴 것이다.
Q: 현역 시절 천하장사 이만기 선수의 유력한 적수였다. 이 선수와의 에피소드는.
이승삼: 이만기 선수와 같이 운동했다. 이 선수와 종합성적 2승 1패이다. 우위를 점했다. 유일한 패배는 88년 부산사직 구장에서 열린 결정전 때이다. 만약 83년 인대 부상만 없었다면 이 선수와의 승패는 달라졌을 것이다.(웃음). 어린 시절 이만기 장사와 함께 하동 섬진강으로 놀러 가서 물 놀이 한 적이 있다. 물과 익숙지 못해 물에 빠진 이만기 장사를 구해준 일이 있다.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현역 은퇴 후 방송 출연을 제의받았다. 당시 언어의 장벽 때문에 포기했다. 경상도 특유의 센 억양의 사투리가 문제됐다. 이후 강호동, 이만기 장사가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때 방송 출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Q: 씨름계에 대한 제안은?
이승삼: 씨름협회도 AI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씨름은 한국의 전통 레슬링(Traditional Korean wrestling )으로 2018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태권도처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시켜 씨름을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웹툰 등을 만들어서 씨름의 대중화에 힘써야 한다.
Q: 일반인 이승삼의 삶은.
이승삼: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12월 악성 골육종을 앓고 있는 박은혜(가명: 당시 12세)를 돕기 위해 마산 지역 3털로 알려진 마산상고 출신의 국악인 신성욱, 연극인 천영훈 씨와 함께 '3털 콘서트'를 가졌다. 나를 키운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 활동을 하 것을 보람으로 살고 있다.요즘 사진에 재미를 붙였다. 마산은 바다가 인접해 있고 공업지역과 농업지역이 나눠진 곳이다. 마산은 현대사에 중요한 지역이다. 6·25전쟁 당시의 마산전투,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 대항한 3·15마산의거 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마산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현재에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창동 예술인과 교류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와 씨름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창원시씨름진흥협의회 부의장). 기업과 협업하여 기존 씨름장을 리모델링하고 신축 씨름장을 만들었다.
Q: 다시 현역 씨름선수로 돌아간다면 어떤 유형의 씨름을 꿈꾸는지?
이승삼: 씨름을 시작하고 은퇴한 지금까지 씨름 인으로 큰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다. 씨름선수로서 공허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씨름의 사춘기가 없다. 다시 씨름선수의 삶을 시작하다면, 지금처럼 씨름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더 완숙한 뒤집기 기술의 씨름을 택할 것 같다.
Q:: 포털 사이트에 이승삼을 검색하면 정치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의 연관 관계가 있는가.
이승삼: 잘못 소개됐다. 정치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관심도 없다.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씨름을 통해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줬다. 씨름선수로서 씨름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지역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통해 갚아 나가고 있다. 이승삼이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역지사지라 생각한다. 이해하는 마음. 보듬는 자세. 그리고 솔선수범 등이 좋은 가족관계와 인간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본다.
Q:평소 모자를 즐겨 쓴다. 이유가 있는가.
이승삼: 중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자를 쓰게 됐다. 아이러니하게 수염은 많은데 머리 수는 없다. 앞머리가 없다. 나이에 비해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모발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썼다. 잠시 모회사 환약을 복용한바 있다. 머리는 나는 것 같은데 건강에 부작용이 나타났다. 환약 복용을 끊고 지인의 추천으로 다모림이라는 제품을 알게 됐다. 머리가 굵어지고 빠지는 것이 감소했다. 머리 수가 많아지니 인생에 자신감도 생겼다. 다모림이 이승삼의 중년 인생 뒤집기했다.
Q: 이승삼 인생의 마지막 뒤집기는
이승삼: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뒤집기는 바로 긍정의 힘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그 힘, 바로 긍정의 힘을 전달하고 싶다. 긍정의 힘을 통해 실패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긍정의 삶을 전달하고 싶다.
Interviewee 이승삼 씨름감독 출생 / 씨름 선수에서 은퇴한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다. 이봉걸, 이만기, 최욱진 등과 함께 대한민국 씨름의 선두 주자 세력이다. 1980년 대학 씨름에 입문하여 1993년 은퇴했다.
Interviewer 이철안 다모림 CEO / 러시아를 유학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 가교 역할을 한 사업가이다. 현재 미학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철안의 모자란인터뷰'를 한국증권신문에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