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환멸을 넘어서… 이란희 감독 독립영화 '휴가'
[윤진현 문화비평] 환멸을 넘어서… 이란희 감독 독립영화 '휴가'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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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라고? 영화가 ‘독립’되어 있다니 어떤 영화는 ‘식민지’ 영화인가? 여기에서 ‘독립’이라는 말은 ‘인디밴드(Indie band)’, ‘인디음악(Indie Music)’에서 사용하는 ‘Independent’의 번역어이다. 영화를 제작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자본, 그러니까 영화제작 영역에 포진한 대자본의 바깥에서, 대자본의 영향력에서 독립한 상태로 제작된 영화라는 뜻이다. 

물론 대자본 영역의 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확고한 벽이나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독립영화는 전체 영화의 하위범주로 이해되기도 하고 아마추어의 영화로 생각되기도 하며 심지어 일부 독립영화 감독이나 제작자는 대자본 영역의 상업영화를 만들기 위한 사전 경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화려한 대자본 상업영화가 보여주는 판타스틱한 화면과 비교할 때, 어쩐지 허술하고 모자란 느낌 때문에 재미없다고 외면하게 되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독립영화’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턱없이 제한적이다. 굳이 중요한 경계를 꼽자면 상업영화는 1차적으로 소비와 향유를 위해 제작된다. 말하자면 판매가 목적이며 많은 사람이 구매할수록 성공이다. 그에 비해 독립영화는 소통이 목적이다. 여기에서는 감독이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의 발신과 이에 반응하는 관객의 의문과 생각, 여기에서 시작되는 대화와 사유의 진척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립영화’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현재의 극장 시스템은 관객과의 대화가 용이하지 않다. 대화는 고사하고 ‘독립영화’를 위한 상영관도 많지 않다. 관객을 만나야 소통이든 대화든 할 수 있지 않은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크고 작은 여러 영화제, 소극장, 커뮤니티 등을 소통의 장으로 삼아서 근근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충분한 소통에는 미흡하다. 하여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상영기회를 얻게 된 극소수의 독립영화는 일단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2020년 제작되어 서울독립영화제, 샌프란시스코국제 영화제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이란희 감독의 독립영화 <휴가>가 개봉되었다. 견주어 볼 만한 대조적 오브제가 풍부하고 반복되며 오히려 악화되는 현실이 섬세하게 안배된 이 작품은 얼핏 노동자의 부당해고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에 한정되지 않는다.  

20여년을 일한 회사에서 문득 정리해고를 당하고 부당해고 소송에서 대법원 판결까지 패소한 노동자들은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농성을 이어가지만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한동안 ‘휴가’를 갖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온 재복은 고등학생, 중학생 어린 두 딸이 살고 있는 반지하 빌라에서 엉망진창인 집안 상태를 만난다. 막힌 싱크대에 오수가 그득한 것처럼 딸들은 오랜만에 아버지와 만났지만 대화를 거부하고 식사를 거부하고 홀로 핸드폰을 보며 컵라면을 먹을 뿐이다. 설상가상 수시에 합격한 딸을 위해 예치금 40만원이 당장 필요하지만 복직투쟁 5년에 친구들조차 조롱하고 놀려댈 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다. 다행히 친구가 주임으로 있는 수제가구공장에서 잠시 일하게 된 재복, 노동자에게 ‘휴가’란 바깥의 일을 끝내고 집안의 일을 해결하는 시간이던가? 졸업을 앞둔 딸은 아버지에게 농성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한다. 

농성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딸들 곁에 남을 것인가? 이 중요한 갈림길 앞에서 재복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극적 갈등이란 근본적으로 똑같이 중요한 두 개 이상의 선택항에서 발생한다.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춘향’이 ‘수청을 들 것인가, 하옥을 감당할 것인가’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인가, 가족을 위해 친일을 할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햄릿의 결정, 춘향의 결정, 독립운동가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처럼 지금 노동자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내리는 결정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인가?

<휴가>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재복이 일하고 있는 세상은 집에 있는 내 자식이나 세상에서 만난 자식 또래 청년이나, 사람끼리 눈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기는커녕 똑같이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며 컵라면이나 먹고 있는 세상이다. 

재복은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싸워온 것일까? 무엇을 위해 싸워갈 것인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재복에게 더 나은 결정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재복이 농성장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복직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재복이 남아 더 열악한 저임금 노동을 감수하며 노동자의 권리에 무지한 청년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면서 가족을 돌본다고 한들, 그것이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선택으로 가는 길일 수도 없다. 

추구하던 가치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을 위한다는 가치가 오히려 인간을 배신하고 인간을 기만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직면하는 감정을 ‘환멸’이라고 한다. ‘환멸’은 단순한 좌절이나 절망과 다르다. ‘환멸’은 문명의 종말을 예고하는 일종의 전조증상에 가깝다. 좌절이나 절망은 새로운 목표와 희망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지만 ‘환멸’은 완전히 새롭게 가치가 정립되지 않는 한 극복되지 않는다. 

고작 일주일 일한 사업장, 일과가 끝나고 임금을 받아들었지만 재복은 연장의 날을 갈고 공구들을 정돈하고 퇴근한다. 쓸데없는 과잉충성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퇴근하여 정성스레 밥을 짓고 멸치를 볶고 소시지를 볶는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챙겨두지만 딸들이 과연 그 반찬으로 밥을 먹기나 할까? 그럼에도 어눌하고 우직한 재복은 밥을 하든 가구를 만들든 일하는 것에는 진심이다. 

그가 내미는 따뜻한 하얀 쌀밥과 정성스레 칼집 내어 볶은 소시지볶음을 받아들고 이것의 가치를 새삼 다시 정립해볼 것인가? 말 것인가? 남은 것은 고작 밥과 소시지볶음뿐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환멸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역시 독립영화는 토론이 필요하고 소통이 필요하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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