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숨차게 숨 쉬는 삶의 예찬… 연극 '렁스'
[윤진현 문화비평] 숨차게 숨 쉬는 삶의 예찬… 연극 '렁스'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9.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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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lungs)라고? 제목은 늘 함축적이다. 사전적인 메시지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고 있다. 
등장인물이 환경학 박사과정이다. 프로그램에도 환경에 관한 정보가 빽빽하다. 대기오염을 다루는 연극 같다. 오늘날 지속가능한 삶과 지구환경에 대한 진지한 언급이 있으며 인물의 삶과 밀접한 만큼, 또 우리 관객들의 당면한 문제인 만큼 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당연히 전부는 아니다. 
중학교 생물시간, 잠깐 딴짓하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께서 ‘호흡’이 뭐냐고 질문하셨다. 들숨, 날숨을 한 번 보여드리고 이것이 호흡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꾸중을 듣게 될 것 같아서 공기 중의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꿀밤을 맞았다. 선생님께서는 방금 그렇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참이었다. 호흡이란 산소를 흡수하고 그 산소를 이용해서 영양소를 분해하고 온몸 구석구석에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전 과정이다. 즉 호흡은 삶이다.

 

렁스(lungs)는 한 커플의 인생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들이 숨 쉬며 이룩한 평범하면서도 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과 사랑의 기록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제각각일 수 있지만 마시는 공기는 같다. 렁스는 삶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연극이다.

무대는 단순하다. 길고 높은 길 모양이다. 인간이 걸어가는 인생길 같다. 영국에서는 도시 안에 있는 공원을 렁스(lungs)라고 한다니 공원의 산책길이라고 해도 좋겠다. 신발로 표현된 이들의 행로는 시적이다. 하나미치(花道)를 연상케 하듯 높직한 무대는 내려다보지 않고 이들의 인생길에 사랑과 존경을 보내기에 좋았다.  

여백이 아름다운 무대와는 대조적으로 대사는 넘쳐난다. 일일이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시끄럽고 빠르다. 크게 보면 단순한 무대처럼 모두 비슷한 삶이지만, 자세히 보면 저마다 소설책 10권은 될 것 같이 다사다난하다. 그리고 이 다사다난한 삶은 결혼을 전후한 청년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한 커플이 있다. 이들은 사랑하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갖는 것은 두렵다. 일상적으로도 아기에게 헌신하며 아기에게 매인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지만 전체 자연환경으로 보아도 인간이 더 이상 유용하고 자연에 어울리는 ‘괜찮은’ 존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공포를 이겨내고 임신에 성공하지만 결국 아기를 잃고 이들은 헤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만나고 사랑을 하고 임신을 하고 결혼을 하며 함께 늙어가고 떠나보낸다.

 

 

우선 한 가지만 먼저 지적하자. 한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함께 하는데, 아기가 원인일 수는 없다. 삶과 사랑은 누구 때문에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재회도 하고 아기도 생기는 것이다. 아기를 핑계로 한 생을 함께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이를 덕분에 수월히 함께한 것이고 함께 사는 중에 보람 있게도 아기를 잘 키워 행복하게 보살핀다면 더욱 축복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 사랑하며 평생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복잡하면서 동시에 전면적이며 혼신을 다하는 기투가 필요한가. <렁스>는 그 평생의 대화를 함축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할 때는 이 작품을 소리치며 읽어보라고 권할 수도 있겠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남자에게는 이미 다른 약혼녀가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하고 아기도 생긴다. 사실 이 지점에서도 이들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이들이 이미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관계임에도 종료된 관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냐를 묻는 것은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행동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남자의 약혼녀에게 위로를 건넬 수도 있다. 인연이 엉킨 것이니 길게 끌지 않고 단번에 끊어지는 것이 아프기는 해도 나쁜 것은 아니다. 한때의 혼란과 어리석음을 넘어 결국은 지혜로운 결정에 이르러 다행이다.

그러나 <렁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한 장면이 아니라 삶 전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존기가 치열한 것은 이들에게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결혼하고 아기 낳는 것을 생민지시(生民之始) 만복지원(萬福之原)이라던 시대라면 행복한 엔딩이었을 것이다. 웨딩마치를 배경음악으로 아기 울음소리 정도 들려주면 끝났을 일이다. 

그러나 호흡하는 대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이것은 엄청난 전환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당연한 존재로 생각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선의나 정의를 단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속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지속을 요구하는 시작이지 않은가. 아마 그 어떤 커플이, 그 어떤 결정을 내리든, <렁스>의 주인공이 겪은 혼란과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몇 마디 격려의 말로는 극복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라는 작품이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에게 어떤 존재가 나타나 귀하고 신성한 아기를 잉태했다고 알려준다. 날개 달린 천사지만 공손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원광을 두른 여성은 여왕처럼 우아하게 앉아 이 소식을 듣는다. 여성들이 이렇듯 고귀한 자세로 임신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다빈치의 <수태고지>는 그런 의미에서 진심으로 신성하고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다빈치의 그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있다. ‘웃음’이다. 임신 또는 출산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수태고지>에서는 공포가 역연하다. 웅크리고 앉은 처녀에게 천사는 백합을 내려주지만 마치 철사에 엮어 붙인 듯하다. 처녀가 수놓은 빨간 천의 백합은 처녀의 붉은 머리에서 이어져 가시넝쿨 끝에 피어있다.

<렁스>가 보여주는 삶이 변곡점, 여기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은 그래서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이들은 이 두려운 수태고지를 회피하지 않고 살아냈다. 그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여성인물의 고통은 애끓고 함께하는 남성인물의 어려움도 절절하다. 그래서 이들이 이룬 사랑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렁스>는 치열함의 연극이고 조용하지 않은 연극이다. 그리고 보고 나면 인간을 더 사랑하게 되는 연극이며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연극이다. 

함께 오래오래 사랑하려면 숨이 차게 숨 쉬어라. 목청 높여 자기 생각을 소리쳐라. 대화가 아니라 혼자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고함도 들어주고 때로는 마주 외치며 함께 하라. 혼자일 때조차 손을 놓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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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모 2021-09-14 09:20:02
멋진 글을 읽으니 작품이 무척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