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우리는 기억한다. 사랑하고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뮤지컬 '유진과 유진'
[윤진현 문화비평] 우리는 기억한다. 사랑하고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뮤지컬 '유진과 유진'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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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낭만바리케이트

연극이 제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제의란 기억행위, 인간이 잊으면 안 되는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만든 의례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잊지 않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자신들의 기원을 잊지 않기 위해 명절을 치른다. 부당하게 사랑을 가로막은 까닭에 안타깝게 목숨을 버린 수많은 젊은이를 잊어서는 안 되기에 우리는 지금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상연한다. 연극의 DNA에는 이러한 기억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금이의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이 뮤지컬로 제작되었다. 현재 드림아트센터 3관에서 상연 중인 이 작품은 이 엄혹한 팬데믹 상황에서도 매진사례를 이어가고 공연마다 수많은 관객의 눈물 젖은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잊으면 안 되는 아픈 사건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성장하는 두 소녀 유진과 유진을 격려하는 박수이다. 

흉악한 유치원 원장, 어린 원아들을 성추행했다. 어린이들은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원장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상처 입은 이들의 회복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받고 얼마간 옥살이를 한다고 쳐도 상처 입은 자들의 치유는 끝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상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서 약도 쓰고 수술도 하고 갖은 치료를 하며 나아가는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면 다행이나 마음에 입은 상처, 영혼에 가한 폭력은 회복된 상태를 확신할 수 없으니 더욱 조심스럽고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피해자는 아픈 것은 고사하고 이 끔찍한 불확실성까지 계속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세상일에 그렇지 않은 것은 없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맞아서 상처가 났다고 해도 그 고통과 상처와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해내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무엇이 제일 좋은 방법인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선택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스럽게도 의료진이나 가족과 친구,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고통을 이겨내며 한 발씩 나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큰유진이의 집에서는 상처를 감추지 않고 온 가족이 함께 사랑으로 이겨냈다. 중학생이 된 큰유진은 부모에게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드러내고 대화하고 관철하는 방법, 요컨대 대화와 소통을 선택한다. ‘대화와 소통’이란 누구나 잘 알며 누구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방법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할 때 가능한 것이며 한 가지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표현을 시도해야만 가능하다. 청소년기, 감정과 표현에 기복이 생기는 것쯤은 일상다반사,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다.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큰유진이의 요구는 처음에는 묵살 당하지만 큰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혼자 원망하지 않고, 울며 소리높여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강력하게 어필하고 설득하여 끝내 관철한다. 

사진 ⓒ 낭만바리케이트
사진 ⓒ 낭만바리케이트

 

소리치는 청소년은 기특하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어린이나 청소년의 요구를 묵살하기 쉬운 것이 기성세대의 상황이다. 사실 기성세대를 설득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어른스럽고 차분하며 격식을 갖춘 설득력 있는 요구이지만 조용히 말로 해서 안 되면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가족이란 서로 너무도 익숙하고 서로 잘 알고 있다고 과도하게 착각하기 쉬운 관계라 오히려 대화와 설득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원만히 대화가 안 될 때는 고성도 필요하다. 고성이라도 질러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아직 충분히 정상이고 충분히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 큰유진이나 소라의 가족들처럼 대부분 가족들은 그렇게 서로 화내고 소리치고 비난하고 열 받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보듬고 아끼면서 함께 살아간다.

문제는 작은유진이다. 작은유진의 집에서는 은폐하고 망각을 강요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과거를 까맣게 망각하기도 하지만 저절로 잊혀진 것과 억지로 잊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도대체 일부러 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지난 일 모두 잊으라고 하지만 여기에서 핵심은 시간을 믿고 새로운 시작으로 지난 일의 결과가 계속 현재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처가 낫고 희미한 흉터만 남았을 때, 할 수 있는 일이지 화농한 상처가 표면에 피를 흘리지 않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작은유진의 집에서 망각과 은폐와 회피를 택한 것을 굳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작은유진의 부모는 그들의 부모에게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여 이미 어느 정도는 부담을 지고 위축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자녀에게 큰 문제가 생겼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은폐하고 회피하는 길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작은유진의 부모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작은유진의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도록 만든 선택을 지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들의 선택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상처는 치료를 해야 낫는 것이지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진실을 알아가는 작은유진이 선택한 자기 치유의 길은 너무도 치열하고 건강하여 눈물이 날 정도였다. 역시 총명하고 성실한 작은유진이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설 <유진과 유진>에서 작은유진이는 방학 동안 춤을 추고 공연을 한다.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대화를 하는 방법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우주 속에서 스스로 고양되는 듯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간은 그 무엇 덕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거니와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춤추고 노래하고 뛰고 달리며 자신이 지닌 힘과 능력을 끌어내며 그 자체로 기뻐하는 일이다. 

현명한 작은유진이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중에도 자신에게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며 멋진 자신의 신체를 무대 위에 드러내고 뛰고 춤추었다. 이는 당장 미국으로 연수를 가거나 학원에서 수학공부를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성폭력도 폭력의 일부일 뿐이지만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냥 폭력 피해자들이 다른 점 중에 하나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긍심을 잃기 쉬운 상태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신체를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다고 비난하는 작은유진의 조부의 생각은 인간 신체가 지닌 가치를 이념적으로 폄훼하던 전래의 폐습이 연장된 결과이거니와 이 근거 없는 생각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의 신체가 대단히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사진 ⓒ 낭만바리케이트
사진 ⓒ 낭만바리케이트

뮤지컬 <유진과 유진>에서 참으로 아쉬운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듯하다. 

사실 작은유진이가 이미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단할 때, 이미 작은유진이의 치유는 시작된 것이었다. 남은 것은 친구와 가족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인간 사이의 일이라 순순히 원만히 진행되지만은 않을 수 있다. 바야흐로 질풍노도의 시기, 학원쯤 땡땡이를 치고 학원비쯤 잃어버릴 수 있으며 허락 없이 기차여행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허심탄회, 부모와 자식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긴 여정의 한 해프닝일 뿐이다. 

곤경에 빠진 친구와 함께 하는 용기, 자신의 속상한 연애사를 솔직히 털어놓는 용기를 가진 큰유진이 염려할 것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진실에 도달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 작은유진이도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이렇게 성장한 작은유진이 앞에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의 상처를 보이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니 참으로 자연스러운 결말 아닌가. 심지어 작은유진이와 그녀의 엄마가 집안으로 돌아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조부와 다시 맞닥뜨린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이들의 영혼을 전처럼 상처 입히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뮤지컬 <유진과 유진>에서는 이 중요한 전환의 포인트가 제대로 포착되어 인물의 발전을 보여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회피의 반복처럼 그려졌다. 그러고 나니 지속적으로 각기 엄마와의 관계 문제인 것처럼 갈등이 분산되고 다소간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해결되어 결과적으로는 세대간 갈등 및 해결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소설의 시간에서 10년이 경과한 28살로 이들의 극중 시간을 설정하여 액자를 결합한 것은 각색에서조차 이들을 믿지 못해서는 아닐까? 

유진이들의 아프지만 단호하게 내딛는 걸음을 좀 더 확신을 갖고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들, 우리 유진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사랑하며, 상처 입은 이를 이해하며 함께 대화하고 공감하고 격려하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지나가다가 어떤 나쁜 자들에게 공격받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이겨냈고 또 이겨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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