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국제 비평] 남미 아프리카 아이티 대통령 암살 배후
[양문평 국제 비평] 남미 아프리카 아이티 대통령 암살 배후
  • 양문평 언론인/칼럼리스트
  • 승인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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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대통령의 암살되면서 혼돈이 시작된 아이티 타바르의 미국 대사관 앞에 모인 시민들은 여권을 들고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7일 새벽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이 용병으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피살된 사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대통령이 거처하는 사저나 관저라면 정규군도 공격하기 힘든 판에 30명도 못되는 수의 괴한들이 쳐들어 가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 우선 그렇다.

보다 놀라운 것은 그 범인들 대부분을 잡았음에도 사건 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사건의 동기와 배후 등이 밝혀지지 않아 온갖 추측이 나돌고 있는 점이다.

그래선지 새삼 그것이 ‘아이티 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아이티’란 세계 최강의 선진국인 미국의 이웃 나라가 아니다. 그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아프리카 국가’ 같은 나라다.

 아이티는 남미의 아프리카 국가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도착한 이곳이야 말로 가장 아메리카적인 곳이나 바로 그래서 백인들의 1차 침략의 대상이 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얼마 안 가서 백인들에게 피살되거나 그들이 구대륙에서 옮겨온  질병으로 거의 다 죽고 아프리카에서 실어온 흑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1150만 아이티 국민의 95%는 흑인이고 나머지 5%는 흑백혼혈이다.

그런 시각에서 이번 사건을 보면 크게 낯설지 않다.

아프리카의 경우 20세기에 육군 상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식으로 수많은 정변이 일어났고 그런 와중에 국가 원수들의 목숨도 헐값으로 날라 갔다. 그런 풍토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남아 있다.

2009년 3월 서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에서는 주앙 베르나루두 비에이라 대통령이 소수의 군인들에게 피살됐다. 그 바람에 그 해 9월 대선이 이루어졌으나 그 대선 판에서도 한 후보가 피살되는 식이었다.

물론 아이티의 인종이 아프리카 일색이라 해서 아프리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아프리카를 연상케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이티의 32대 대통령 프랑수아 뒤발리에(1957~1971)와 그의 아들인 33대 대통령 (장클로드 뒤발리에(1971~1986)의 경우가 보기 좋은 예다.

이들 부자가 30년간 혹심한 고문 등으로 장기 집권한 것은 후진국에서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나 아들인 장클로드는 너무 특이한 데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60년대부터 유난히 뚱뚱한 몸매로 타임지 등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다.
그가 관저에서 권총사격 연습을 한다며 경호원을 쏘아 부상을 입힌 것은 어쩐지 대통령이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우간다가 있는 대륙의 일 같기만 했다.

그는 1986년 민중 봉기로 쫓겨났으나  프랑스에 망명해서도 부정축재 했던 돈으로 궁궐 같은 데서 살았는데 그를 추방하려는 군중들이 몰려와 시위를 하자 “저 사람들 왜 저래?”하며 히죽이죽 웃었다.

하지만 아이티의 그런 트래지코미디(희비극)를 두고 웃는 것은 비정한 수준을 넘어 생각이 짧은 것이기도 하다.

 지리적 숙명으로 남미의 아프리카가 된 아이티는 아프리카가 제국주의에 당했던 비극들을 집약적으로 당하듯 했다.

 이 나라는 남미와 아프리카를 통 털어서도 으뜸일 만큼 오랜 세월 유럽의 착취를 받았던 것이다.

아이티는 16세기 말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을 점령함으로써 생겨난 셈이다. 섬의 동쪽은 이미 스페인 지배한 채 오늘날은 도미니크 공화국으로 아이티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프랑스 지배하의 아이티가 더 축복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문화를 숭상해 인도적이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착취기술은 상향평준화돼 있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잔인했다.

다만 프랑스가 나폴레옹 전쟁에 바빠 아이티가 독립전쟁에 나선 것은 우선 축복으로 보였다.

 프랑스가 물러나 아이티가 1804년 독립을 쟁취한 결정적 요인은 본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바쁜 데다 그 지역에서도 스페인군과 영국군 동맹의 등쌀에 못 이겨 서였다.

하지만 독립의 승리감에 우쭐해 탈출하지 못한 백인 2000~5000명을 학살한 것은 아이티에 장기적인 비극을 초래했다. 아이티가 백인 국가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했던 프랑스가 1825년 함대를 이끌고 와서 말도 안되는 협박을 할 수 있었다. 아이티가 독립하면서 빼앗은 농장 등 피해액 1억5000만 프랑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1억5000만 프랑이면 3000만 달러수준으로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때 지불한 돈이 그 절반인 1500만 달러였다.

프랑스는 그 배상금을 그 뒤 9000만 프랑으로 깎아주는 ‘선심’을 썼지만 아이티가 그 돈과 거기서 파생된 이자를 다 갚은 것은 122년 뒤인 1947년 이었다.

다시 말해 한 세기 이상 빚쟁이 노예노릇을 한 셈이다. 매년 국가예산의 80%가 배상금 지불 명목으로 털리면서 국가재정은 물론 정신도 고갈된 셈이었다.

아이티에 흔히 따라 다니는 ‘최빈국’이나 ‘부패천국’의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2100년의 아이티 대지진도 한결 더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이번 사건을 두고 미국이 사건 수사 등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이티가 걸어야 할 어두움과는 무관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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