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현 문화비평] 발레 흉내에서 발레하기를…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윤진현 문화비평] 발레 흉내에서 발레하기를… 창작가무극 '나빌레라'
  • 윤진현 연극평론가 칼럼리스트
  • 승인 202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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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서울예술단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시 <승무>, 온 국민이 애송하는 이 구절은 음미할수록 오묘하다. 우선 어미부터가 특별하다. ‘나빌레라’의 ‘~ㄹ레라’는 ‘ㄹ러라’에서 온 말인데 ‘~로다.’, ‘~와 같구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 ‘나비로다’, ‘나비 같구나’로 해석할 수 있다. 발음에서 느껴지는 음악성은 연속되는 ‘ㄹ’ 덕분인데, ‘ㄹ’은 우리말 유일의 유음(流音)으로 ‘러라’에서는 혀끝을 잇몸에 가볍게 한 번 튕기면서 내는 소리이다. 입 안에서 혀 끝이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하다.

첫 구와 마지막 구가 같아 수미상응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니 구도를 향한 작은 움직임이 껍질을 벗고 비상하여 위대한 각성에 이르는 이치가 한 편의 시 안에 온전히 펼쳐진다. 같은 구절이라고 해도 첫 구는 고요하다. 춤을 추려고 준비 자세를 잡은 비구니의 고깔이 나비와 같다. 만약 이 구절이 첫 구로 그쳤다면 다만 인상적인 비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격렬한 춤사위가 이어지며 거룩한 합장에 이르는 순간, 귀뚜라미까지도 물아일체가 되는 순간에 이 나비는 훨훨 날아오른다. 이는 다만 날다가 앉아있던 나비가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막 고치에서 탈피하여 날개맥에 체액이 흐르며 접혀있던 날개가 펼쳐지고 앉은 채로 날개짓을 해보며 준비하다가 드디어 날아오르는 장면과 같다. 경외스럽고 장엄하다.

그런데 이 ‘나빌레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의적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납의ㄹ레라’라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의’라는 발음은 복합적인 음운 환경에서는 ‘이’로 단순해지는 경우가 많으니 ‘납읠레라’를 ‘납일레라’로 발음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납의(衲衣)’는 승려의 법의를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이 내다버린 헝겊을 누덕누덕 모아 기워만든 옷이다. ‘얇은 비단을 접어 만든 고깔’이라는 설명이 있으므로 이는 2차적으로 고려할 수 있을 뿐이지만 고승이 입는 누더기 가사를 승무의 의상으로 겹쳐 놓을 때, ‘나빌레라’의 의미는 더욱 심오해지며 표면적인 여성성을 넘어서 구도의 춤사위는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된다. 

사진 ⓒ 서울예술단

<나빌레라>라는 작품이 웹툰으로 발표된 것은 2016년이다. 웹툰계에서는 꾸준히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올해 TV드라마로 제작, 방영되면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듯하다. 뮤지컬 <나빌레라>는 2019년에 초연되었고 올해 재공연에 돌입하여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최근에는 웹툰을 원작으로 TV드라마, 영화 등이 제작되는 사례가 흔한데 이처럼 ‘웹툰’이라는 장르가 명실상부 모든 콘텐츠의 시작이 되고 있는 현상은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나빌레라>는 노인과 젊은이의 소통과 성장의 드라마이다. 세대 간 갈등이란 결국 대화와 공존공생과 협력을 통해 넘어설 수 있다. 당연한 해결책이지만 정답이다. ‘노인’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적절하다. 최근 ‘신중년’, ‘50플러스’, ‘5060세대’와 같은 이 연령대를 새로운 세대로 규정하고 이 세대가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가시화하면서 일종의 ‘미답상태’이던 노인 시기를 해명하려는 문화적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노인이 주인공인 문학, 영화, 드라마 등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노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엄혹한 역사적 격동기, 그저 살아내느라 바쁜 시기에는 ‘노년’을 제대로 조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안전하게 늙어 평온한 노년을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노년’과 ‘노인’이 어떤 존재인지 묻는 것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사진 ⓒ 서울예술단

<나빌레라>는 노인의 꿈이라는 매우 유효한 질문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에 부합하는 탁월한 기획이다. 더욱이 그 소재가 ‘발레’라면 이는 진실로 무대의 영역에서 다뤄볼 만하다. 물론 쉽지는 않다. 발레는 신체의 통제를 극대화하여 중력을 넘어서는 예술이다. 사람인지 새인지 구분할 수 없이 공중을 나는 듯한 그랑제떼(grand jete)를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발레인들은 척추가 S자가 아니라 1자라고 한다. 말 그대로 뼈를 재구성하는 노력을 통해서 ‘저 세상’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더구나 70노인이 발레를 한다? 웹툰에서는 물론 가능하다. 이 참신하고 멋진 발상은 환상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다. 그 어떤 장벽도 있을 리 없다. TV드라마에서 70노인이 발레를 한다? 약간의 난항은 있겠지만 전문가의 도움과 반복촬영, 카메라 편집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 음악과 조명 등으로 자연스레 감동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런데 뮤지컬에서 발레를 한다? 신체를 만들어가는 시간이 없이도 그것이 가능할까? 이 의문은 극적인 것이다. 멋진 무대를 만들 기본조건을 구비한 셈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정말 어렵다. 무대에서는 ‘발레를 해야 한다.’ 발레는 하는 척이나, 발레 흉내만으로는 어림 없다. 발레를 하기로 했으면 발레를 하는 거다. 뮤지컬 <나빌레라>는 그래서 기대가 되었다. ‘발레’라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70에 이르러서도 조금이나마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랴. 70노인이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 희망이 있다.

2차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원작과 비교된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 작품으로서 완결성이다. 이는 원작과 달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작을 보지 않고도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작을 아는 관객/시청자가 ‘원작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한다면야 금상첨화이지만 ‘원작에 비해 별로였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시청자는 최소한 “원작 안 봤는데, 괜찮았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작을 모르고는 도대체 맥락을 알 수 없다면 제일 중요한 각색에서 실패다. 

뮤지컬 <나빌레라>는 우선 인물성격에 개연성이 없다. 아버지가 발레를 하겠다는데 자식이 왜 반대를 할까? 제일 큰 이유가 몸을 드러내는 것이 춤바람 난 아버지가 남의 이목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사실 남의 이목이란 언제나 핑계다. 자신이 싫은 것을 남의 이목으로 둘러대는 것이다. 게다가 자식으로 아버지의 몸을 부끄러워하다니 패륜이 별것인가. 여기에 불효자식이란 신파조 반성이 결합하는 전개는 도저히 맥락이 닿지 않는다. 이렇듯 개연성 부족한 인물이 주요 갈등을 담당하고 있으니 극적 전개는 지지부진하였다. 

청년 채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대에서 도입부란 주요 인물과 갈등의 기초정보가 제시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불필요하게 긴 시간 계속되는 배달 아르바이트는 이 작품이 도대체 ‘배달하기’가 주요사건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채록과 갈등을 빚는 성철이는 도대체 왜 그렇게 난폭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고 개연성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은 불편하고 상투적이었다. 게다가 어려운 형편으로 꿈을 포기하는 일이 없지 않다고 해도 재능있는 청년들은 보통 자기 재능의 깊이를 안다. 말하자면 ‘채록’의 핵심문제는 발레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여기에 100% 올인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가 주요 갈등으로 결합하는 것은 디테일한 서사가 가능한 웹툰이나 TV드라마, 대사 중심의 연극이라면 모를까 뮤지컬에서는 불필요하고 부수적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 가장 중요한 가능성은 70노인이 정말 ‘발레’를 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발레’를 한다면 제일 큰 장애물, 가장 큰 갈등은 ‘발레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런데 마음대로 될 리 없는 ‘발레하기’가 오로지 ‘열심’ 그 하나로 갈등과 좌절도 없이 전개되다니 덕출의 꿈이 ‘발레하기’가 아니라 ‘발레하는 척하기’, ‘발레 흉내내기’, ‘발레하는 사람과 어울리기’였던가.

사진 ⓒ 서울예술단

최소한 기본적이지만 우아한 앙바(En bas)나 앙아방(En avant) 같은 손동작, 바를 잡고 보여주는 바뜨망(battement) 같은 다리 동작, 플리에(plié)의 기초동작만이라도 우아하게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더라면 아름다웠을 것이다. 일보 물러서서 주인공 덕출은 노인이니 그렇다쳐도 꼬르드발레(corps de ballet)의 어정쩡한 발레 흉내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발레를 소재로 한다면 최소한 3~4분의 칼군무 정도는 보여주어야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이 모든 문제는 뮤지컬로서 완결성을 추구하는 대신 원작 웹툰에 의존하여 쉽게 병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보여주어야 할 역동성이 미흡하다는 점은 제작진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무대장치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 표현의 극대화 대신 맥락 없고 불필요한 장면 전환에 요란한 조명이 볼거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발레를 하고 싶은 노인의 꿈을 진정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은 무대뿐이다. 덕출의 꿈을 적극 지지하는 만큼, 이것이 그림 속에서나 카메라 속에서가 아니라 무대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치를 벗어나는 나비처럼! 무거운 누더기 납의를 벗고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사진 ⓒ 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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