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 극단 선택…前여비서 미투 고발이 단초
박원순 서울시장 극단 선택…前여비서 미투 고발이 단초
  • 조나단 기자
  • 승인 2020.0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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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딸이 실종신고
여비서, 8일 서울경찰청에 성추행 고소장 접수
박원순 서울시장@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박 시장의 딸이 9일 오후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지 7시간 만인 10일 오전 0시께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의 현장감식 절차를 거쳐 서울 종로구 연지동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뒤 오전 3시 30분께 영안실에 안치됐다.

박원순 시장 딸은 9일 오후 5시 17분께 '4~5시간 전에 아버지가 유언 같은 말을 하고 나갔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며 112에 신고했다. 박 시장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포착된 서울 북악산 일대. 경찰은 수색하던 10일 오전 0시께 삼청각 인근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응급구조견.

경찰 관계자는 "신고를 접수하고 9일 오후 5시 30분께부터 수색을 시작해 6개 중대 420여 명 등 총 773명(경찰관 635명, 소방 138명)과 야간열감지기가 장착된 드론 6대, 수색견 9마리로 철야수색을 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이날 오전 10시 44분께 공관을 나선 것으로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해 확인됐다. 그는 10여 분 이후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을 지났다.

박 시장이 죽음을 택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실종에 앞서 전날 서울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과에는 박 시장을 상대로 한 고소장이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인은 서울시청 근무 경력이 있는 박 시장의 전직 비서이다.  그녀는 박 시장으로부터 수차례 성추행을 당했다며 서울경찰청을 직접 찾아 고소장을 접수했다고 한다.

박 시장이 신체 접촉과 더불어 텔레그램 등으로 개인적인 사진을 보내왔다고 주장하며 대화록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찰청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고소장 접수 이후 경찰청장 등 수뇌부에 긴급 보고까지 했다고 한다.

박 시장의 사망과 이 같은 고소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며 단지 추정중이다.

박원순 서울시장@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뉴시스

박원순, 시민운동가에서 서울시장까지 파란만장한 인생

박원순 서울시장은 역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이었다.

박 시장은 20년이 넘게 시민사회에서 활동해온 한국 시민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서울시에 입성한다. 변호사 출신의 '진보적 시민운동가'에서 정치가로 변신한다.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에서 모금 전문가로, 그리고 서울시장으로 변신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

마직막 도전인 '대통령 선거'라는 큰 꿈을 앞두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부동산 대책' '전국민 고용보험' 등 핵심 이슈를 선도하며 대선으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박 시장은 지난 9일 실종신고가 된 지 약 7시간만에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대선의 꿈도 이룰 수 없게 됐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에는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다.

법조인의 꿈을 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3개월 만인 1975년 5월 고(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4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학교에서도 제적된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로 재직했으나,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사표를 썼다는 게 박 시장의 설명이다.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박 시장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는다.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박 시장은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으로 주목받았다. 직장내 성희롱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최초로 갖도록 한 이 사건은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1998년 서울고법에서 승소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1994년에는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한다.  시민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약한다.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선운동', '1인 시위' 등을 벌이며 정치권과 사회에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았다.

2000년부터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두며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한다.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열었다. 2006년부터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재직한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협치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한다. 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에 도전한다. 선거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박 시장이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뒤부터 여권의 검증 공세가 이어졌다. 병역, 가족사, 학력, 과거 이력 관련 의혹이 쉴새 없이 제기된다.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되면서 당선에 성공한다.

서울시장이 된 박 시장은 재선에 당선된 이후에도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도시재생 등 자신이 꿈꿨던 수많은 사회혁신 정책을 하나 둘씩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다 중도포기 한다.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그의 꿈은 이제 여기까지. 9일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꿈꾸었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볼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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