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소설] 제21화 ‘볼 건 다 본 여자야’
[기업소설] 제21화 ‘볼 건 다 본 여자야’
  • 이상우
  • 승인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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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지는 혼자 맥주 두 병을 다 마셨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어느새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조민지는 깜짝 놀랐다. 자기 앞에 꿈처럼 박민수가 서 있었다.
“박 대리님!”
조민지는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나왔다. 벌떡 일어서서 박민수를 마주 보았다.
“여기 앉아요. 우리 맥주 한잔해요. 전에처럼...”
조민지가 박 대리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민지 박민수의 기분을 다치지 않을 셈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장 승진을 축하합니다.”
“아이 쑥스럽게도.”
“승진은 승진이니까요”.
박민수는 조민지가 따라 주는 맥주를 마시며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는 건데...”
조민지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무슨 말씀을... 인생에 있어서 찬스란 단 한번 밖에 없다고 합니다. 찬스가 왔을 때 놓치면 안 됩니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박민수 대리의 말투가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사람이 된듯했다. 조민지는 너무 낯설다고 느꼈다.
“그런 말투 싫어요.”
“싫어도 할 수 없죠. 비록 사표는 냈지만 나보다 두 칸이나 위인 상사님이셨는데...”
“그렇게 빈정대시기예요? 그럼 나도 사표내고 말거예요. 나도 사표를 내버리면 대리고 차장이고 다 없어지는 것 아녜요? 박민수씨와 조민지. 썸 타는 사이가 될 법도 한 일 아녜요?”
조민지는 자기 말이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제어하지 못했다.
“우리 함께 회사를 그만 두든지, 함께 회사에 다니든지 그렇게 해요.”
“우리가 왜 행동을 같이해야 합니까? 나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난 차장님 밑에 있는 여러 명 중의 일개 대리였을 뿐입니다. 조차장님은 승승장구 승진해서 머잖아 영종 그룹의 사장님 회장님이 되셔야죠. 나야 소위 인기학과를 나왔으나까 취직이야 어렵지 않겠지요.”
박민수는 천장을 향한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민수씨, 정말 왜이래요. 남자답지 않게. 좀 쿨 해질 수 없어요?”
조민지는 그의 빈정거림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박 대리님. 억울하면 정정당당하게 다시 싸워요. 비겁하게 사표가 뭡니까? 비겁해요.”
조은지의 말이 약간 어둔해졌다. 맥주 두 병을 혼자 마신 것이 이제야 약간의 취기를 불렀다.
“나가요. 집에 데려다 줄게요.”
눈치를 챈 박민수가 조민수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박민수는 자기가 늘 타고 다니는 경차 모닝 운전석 옆자리에 민지를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조민지는 박민수의 옆자리에 앉아 달리면서도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우울하다기 보다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박민수가 사표를 낸 건에 자기가 화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자기가 화가 난다는 것 자체가 화나는 일이었다.
- 치이, 지가 뭔데? 사표를 쓰든 네표를 쓰든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혼자 이렇게 반문해 보았으나 시원하지 않았다. 그와 자기가 보이지 않는 끈끈한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우리 들어가서 맥주 한잔만 더 해요.”
집 앞에 온 조민지는 어쩐지 박민수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인가 결말을 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안 잡아먹어요. 들어가요. 라면 끓여 줄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꽃향기가 집안에 가득했다.
“언니, 우리 집에 축하한다는 화분이 많아. 네 개나 왔어. 차장 된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동생 순자가 뛰어나오며 한 말이었다. 순자는 신장 이식을 한 뒤에 예후가 좋지 않아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거부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순자는 화분이며 선물상자를 일일이 가리키며 신이 나 있었다.
그 중에도 조민지가 놀란 것은 홍 사장과 백삼식 강원그룹 회장이 보낸 난초 화분이었다. 그런 분들이 자기를 알아주었다는 것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업과의 김 대리나 자재과의 이규명 대리 같은 사람이 보낸 선물은 불쾌하고 낯간지러웠다
“같이 근무하는 박민수 오빠. 순자야 인사하고 들어가.”
조은지의 말에 순자는 입을 다물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조민지는 박 대리를 오빠라고 소개한 것에 스스로 놀랐다. 조그만 거실에 마주 앉았다.
“순자가 얼굴이 좀 안 좋은 것 같네요?”
박민수가 물었다.
“경과를 더 두고 봐야한대요. 내 신장은 자매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럼 다시 다른 신장을 이식해야 하나요?”
“모르겠어요. 쟤는 아버지 잘 못 만나 인생이 망가져가요. 불쌍해서 죽겠어요.”
“힘을 북돋아주어요.”
“우리 그 얘기는 접어두고 술이나 더 마셔요. 어쩐지 오늘 밤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해보고 싶어요.”
“좋아요. 밤새도록 한번 마시고 내일 다 잊자고.”
두 사람은 무슨 내기라도 하듯 포도주를 입에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 맥주 한잔 더해요. 아니 맥주는 없고 양주 한잔해요.”
조민지가 부엌에서 간단한 안주와 양주병을 꺼내 왔다.
맥주로 취기가 올라있던 조민지는 금세 취해버렸다. 두 사람의 자세가 차차 흩으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야, 박민수. 네가 뭐야? 오빠야? 대리 주제에...”
“이제 대리 아니야. 오빠야.”
“비겁한 오빠. 사표내고 숨으면 감춰지나? 그 못난 모습.”
조민지가 헛소리 아닌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민수도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왔다. 포도주 빈병이 세 개로 늘었다.
“응, 오빠라고 부르는 게 맞지. 내가 오빠야. 민지 내가 네 오빠야.”
박민수가 갑자기 윗옷을 훌렁 벗었다.
“어! 제법이네.”
조민지는 떡 벌어진 박민수의 벗은 상체를 바라보며 숨을 훅 뱉었다. 탄탄한 팔뚝이며 근육질 가슴 밑에 식스 팩이 탐스러웠다.
“자 너도 벗고 덤벼. 그레코로망 한판 붙자.”
학생 때 레슬링을 조금 했다는 박민수가 엉뚱한 제안을 했다. 그레코로망 레슬링은 하체를 사용하지 않는 씨름 아닌가?
“오빠는 역시 겁쟁이야. 붙으려면 아래도 벗어. 나 남자 물건 본 거 한두 번이 아니야. ㅋㅋㅋ. 여영진 박사 물건 죽여주더라. 어디 오빠 것 좀 보자.”
“뭐? 여영진?”
박민수가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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