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베트남은 두려워해야 할 나라
[양문평 시사논평] 베트남은 두려워해야 할 나라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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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지난해 10년 만에 스즈키 컵을 안은 것 말고도 10년 만의 경사가 또 있었다. 국민총생산(GDP)성장률이 10년 이래 최고인 7.08%를 기록한 것이다. 베트남 통계당국은 그것이 작년 경제성장률 최대 목표치 6.7%를 넘어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것은 최근 박항서 감독의 쾌거로 한국과 부쩍 가까워진 베트남의 일이니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그런 경제성장은 스즈키 컵 우승처럼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어딘지 무거운 소식이기도 하다. 그 경제성장은 ‘박항서’ 같은 한국인의 도움이 없이 이룩한 것인 데다 축구와 경제 자체가 너무 다른 것이어서 다.

동아시아 국가로써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는 같은 바닥에서 협력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경쟁의 대상이 인구 9800만으로 1억 인구를 바라보며 남한 인구의 두 배에 가깝고 남북한 인구 7614만 보다도 많은 인구대국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 말을 새삼 꺼내는 것은 한국인들의 잠재의식에는 베트남을 얕잡아보는 심리가 깔려 있는 듯해서 다. 한국인들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과 가까운 인연을 맺은 이후 반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까지 한 번도 베트남에 대한 우월의식을 버린 적이 없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이 베트남인에 대해 보인 자세는 우월감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유형의 것이어서 세계사에 남을 정도였다. 그러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 단절됐던 양국 국교가 1992년 재개되자 한국인의 그 우월감은 베트남전의 뒤풀이 같은 ‘자숙 기간’을 거치는 듯 했으나 금방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전쟁에는 이겼으나 전쟁이 할퀴고 간 경제가 일어나는 데는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해서다. 그래서 베트남의 여인들은 곧잘 다른 나라의 ‘노총각 문제’ 해결의 자원으로 한국에도 많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 들어오는 순간 자동적으로 사회의 하층에 자리매김 됐다. 반면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인들은 곧잘 고용주가 됐으니 그 옛날 프랑스인들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한 셈이기도 했다.

그런 정경을 볼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중국과 만나던 과정에서 있었던 시행착오 같은 것이다. 한국 전쟁이래 중국은 우리에게 멀고도 먼 <무찌르자 오랑캐/몇 백만이냐/…>의 나라였다. 그러다 냉전기간을 통해 중국이 세계적 강대국이 되자 ‘죽의 장막’ 저편은 신비한 세계가 됐다.

특히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이후 그 곳은 ‘삼국지’나 ‘수호지’의 영웅들이 활개 치거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 같은 동경의 대상이 됐다. 1983년 일어난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당시 한국이 보여준 정경은 그런 정서를 잘 보여주었다.

그것은 중국 국내선 여객기가 랴오닝 성 선양(瀋陽)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납치돼 춘천의 미군 항공기지에 불시착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처음 중국 민항기가 한국 영토에 들어오게 됐지만 냉전시대 흔히 있을 수 있는 항공기 납치 사건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사건은 외교적 관례에 따라 해결돼 승객과 비행기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 당국과 한국인들이 보여준 정황은 새삼 놀라웠다. 거기엔 <무찌르자 오랑캐>의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는 대신 과공(過恭)은 넘쳤다. 그 중국인들을 워커힐에서도 최고급 객실에서 숙식하게 하면서 자연농원 등의 관광을 시켜준 것은 물론 떠날 때는 컬러TV까지 선사했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들이 도처에서 꽃다발을 받은 것이었다. 꽃다발 증정은 뭔가를 축하하는 것이니 여객기 납치를 당하고도 생명에 이상이 없는 것을 축하한 것이었을까. 반면 그 민항기를 납치한 6명은 ‘반공투사’나 ‘자유의 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1년간 구속됐다가 추방형식으로 타이완에 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황은 이해할만 하다. 개인이건 나라건 한 골목에 사는 덩치에게 잘 보여야 신상이 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무튼 그런 ‘정성’이 통했던지 그로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984년에는 중국서 열린 데이비스컵 대회에 한국이 출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중국 여자 탁구스타 자오즈민(焦志敏)과 안재형이 만나 이듬해는 양국의 매스컴을 달구는 한중 러브스토리가 연출됐다. 당시 한국인들이 그 러브스토리에 보인 관심은 단순히 이념적으로 다른 나라 남녀의 사랑이라는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자오즈민은 ‘꿈속의 대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돼서 사람들은 한국 남자 안재형이 선녀와 로맨스를 벌이고 있는 듯 안달하다가 1989년 결혼이 성사되자 세기적 로맨스가 성사된 듯이 열광했다. 하지만 막상 그 당시 중국의 모습은 그런 무릉도원과는 거리가 너무 먼 상태였다.

안재형의 결혼이 이루어진 다음해 열린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몰려간 한국인들은 너무 후진 중국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들이 본 베이징 골목길은 청나라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초라하고 불결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공산권 국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그럴 때 너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등 갑질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도 우리의 ‘냄비근성’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무릉도원 사람들’은 금방 ‘짱꼴라’로 격하되고 말았다.

반면 그 옛날 중국인들에게 ‘짱꼴라’라는 딱지를 붙였던 일본의 관광객들은 정중하게 처신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입장식에서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자 야유가 나온 반면 일본 선수단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 침략의 피해자들인 한국과 중국인들이 갈라서고 그 사이에 침략자인 일본인이 끼어든 모양새니 지하에서 윤봉길 의사의 넋이 얼마나 슬퍼했을까.

그러고도 한국인들은 중국서 오랫동안 갑질을 할 수 있었다. 산업발달의 수준차이로 중국의 임금이 싸서 한국은 중국인들을 고용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중국의 추격은 무서워 한국 기업들은 많이 중국을 떠나게 됐고 그럴 때 1차로 발길이 닿는 곳이 베트남이었다.

그래서 베트남은 또 한 번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실은 박항서가 그런 매직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도 그런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베트남과 한국의 만남은 한국과 중국의 만남과는 딴판이면서도 곰곰이 보면 공통점도 너무 많다.

우선 둘 다 전쟁 상대로써 만난 것이다.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싸운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우리가 남베트남 정부를 도우러 간 것으로 돼 있으나 한국이 도운 그 정권은 사실상 인민에 버림받았으니 우리는 베트남인들과 적국으로 만난 셈이었다.

둘 다 공산치하에서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해 후진적인 것도 같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면 중국과 베트남은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특유의 출세욕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의욕과 노력이 충만해 있다. 그것은 중국인의 비율이 높은 싱가포르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었던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 그 지역에서 발군의 발전을 이룩한 데는 다른 원인도 있겠으나 싱가포르 국민의 성향을 떼놓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형제와 같은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세우듯 하노이에 안남도호부를 세운 것도 그렇다. 그 도호부란 중국에 껄끄러운 주변국에 세운 것이니 두 나라에게는 안(安)자 돌림의 형제 같은 숙명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현시점에서는 한국이 ‘형’의 위치에 서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우리는 그 관계에서 삼가고 두려워해야 한다. 물론 그 두려워함이란 적국을 대할 경우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선비들이 후배를 존중한다는 뜻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후생과외란 선비들이 후배보다 먼저 배워서 앞서가고는 있지만 그들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후배를 미리서 존중하라는 의미다. 뭐든지 윗자리나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삼가고 존중하는 자세로 대하는 게 슬기로운 일이 아닌가.

더욱이 베트남은 덩치가 남한의 두 배고 남북한보다도 더 크니 아주 두려운 후배다. 우리는 시운이 좋아서 그들을 앞섰을 뿐이다. 베트남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쓰러질 때 한국은 스포츠 강국의 기치를 내걸고 스포츠 발전에 진력했다. 따라서 앞으로 베트남이 스포츠에 정진하면 그 1억 인구 가운데 수많은 ‘박항서’가 배출될 수도 있다.

경제의 경우도 그랬다.

베트남의 산하가 고엽제로 병들 때 한국은 베트남 경제 특수를 누렸다. 그러던 베트남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러고 보니 한국은 아직 분단도 해결 못한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겁먹는 것도 모범적인 국민들의 길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부쩍 국력이 커질 베트남을 예상하고 그들을 정중하고 성실하게 대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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