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 시사논평] 흑인이 쓴 ‘엉클 톰스 캐빈 2018’-미셀 오바마 자서전 열풍
[양문평 시사논평] 흑인이 쓴 ‘엉클 톰스 캐빈 2018’-미셀 오바마 자서전 열풍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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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인 미셀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이 세계적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 세계의 31개 언어로 출판된 것이 그렇고 역대 미국 대통령 부부 자서전 사상 최고액의 판권(730억 원 추정)이 그렇다.

미셀은 그 자체가 화제의 인물이었다. 흑인 대통령의 흑인 부인이라는 것을 한 세대 전만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거기에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변호사라는 경력을 쌓은 흑인 퍼스트레이디이니 그 선풍은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미셀이 다음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 아니냐는 등 그 파문도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고 있다. 1852년 출간된 해리엇 비처 스토 여사의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회상케 되는 것도 그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저술이 모두 여성의 저술로 세계적 화제를 모은 점도 같다. 스토는 백인 여성인 점이 다르나 두 책에는 모두 ’흑인‘이 있다. 흑인 노예의 참상을 그린 ’엉클 톰스 캐빈‘도 37개 언어로 번역돼 해마다 30만 부 씩 팔린 것은 당시로써는 경이적인 판매율이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절찬을 받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그리고 러시아 작가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가 격찬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투르게네프는 눈길을 끈다. 투르게네프가 그해 러시아 농노들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는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를 발표해서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상속으로 방대한 농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농노들의 생활은 그에게 너무 친근한 일상이었다.

아무튼 ’엉클 톰스 캐빈‘이 나온 지 10년이 안된 1861년에 터진 남북전쟁에서 진짜 승자는 링컨이 아니라 스토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으로 해방된 흑인 노예와 투르게네프네 농장서 해방된 농노들은 달랐고 그런 점에서 미셀의 책은 또다시 눈길을 끈다. 

그래서 그 책은 ’엉클 톰스 캐빈-2018‘처럼 비친다. 백인 농노들은 ’농노‘라는 딱지를 떼는 순간 해방되지만 남북전쟁으로 해방된 흑인은 쇠사슬만 벗었을 뿐 ’사람‘이 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남북전쟁이 끝나 노예가 해방된 1865년에 패전한 남군 출신들이 결성한 흑인 박해 세력들이 결성한 쿠 클럭스 클랜(KKK)은 흑인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대신 총으로 쏘았다. KKK가 아니라도 많은 흑인 지도자들이 백인들의 총에 쓰러졌다.

흑인으로써는 이례적으로 신학박사이자 목사가 된 마틴 루터 킹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는 1963년 평화대행진을 실시하며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하여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그 4년 뒤에 암살됐으니 그 꿈은 지하에서나 꾸게 됐다.

그런 시체를 넘고 넘으면서 흑인들은 점차 ’사람‘에 접근하는 과정을 걸어왔다. 흑인들을 더 괴롭히는 것은 KKK의 하얀 두건도 쓰지 않고 총도 들지 않은 백인들의 경멸이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따른 것이기에 링컨의 선언이나 마틴 루터 킹의 연설 같은 충격적인 이벤트로 속 시원히 해소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흑인이 미국의 스포츠계를 누비고 그래서 그 흑인 스타들에게 많은 백인 소녀 팬들이 몰린다 해서 그 얼룩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도 여러 부류가 있어서다. 그들 가운데는 흑인들을 아프리카 초원의 야수 비슷한 존재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런 백인들의 눈에 어느 흑인 농구선수가 점프슛을 성공시켜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그것은 초원의 표범이 날렵하게 나무에 올라가는 것이나 원숭이가 높은 가지에 열린 열매를 낚아채는 정도의 솜씨로 비쳐 새삼 그들의 편견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일본인들의 재일동포 차별에서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전 직후의 일본에서 한국출신의 역도산이 프로레슬링에서 신화를 장식했지만 일본인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 축구팀이나 권투선수들이 곧잘 한국 선수들에게 패해도 재일동포들은 ’조센징(朝鮮人)‘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인들이란 그저 야쿠자나 그 아래 부류들처럼 비쳤으니 역도산이 링에서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도 가증스러울 수 있었다. 실제로 야쿠자에는 재일 동포들이 많았다.

재일동포들 가운데는 돈을 많이 벌어 거부가 된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일본인들의 존경을 버는 이들은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인들이 주로 돈을 벌었던 것은 야키니쿠(燒肉)라는 불고기집 경영이나 파칭코 사업으로써 어느 것이나 일본사회에서는 천업에 가까웠다.

재일동포들과 미국의 흑인들에게는 환경이 비슷한 데가 있었다. 흑인들이 슬럼가에서 살듯이 재일동포들도 그 비슷한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해놓고 더럽다고 경멸하는 식이다.

다만 재일동포들에게는 그런 역경을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있었다. 그것은 1980년대부터 일본에 많이 진출한 한국인들의 존재였다. 그들은 사업가나 대기업 사원에서부터 학생들까지 여러 경로로 일본에 진출했으나 하나같이 국제적인 표준 시민들로써 ’새로운 조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바탕에서 새 밀레니엄을 맞은 2004년 KBS-TV 드라마 ’겨울 연가‘가 일본에 수출돼 호평을 받음으로써 일본인들의 한국인데 대한 시선은 새 시대를 맞는다. 그 새 시대란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용준이 ’욘사마‘((ようん[勇]さま))라는 왕족 같은 호칭을 얻는 것으로 상징된다.

실은 지난 세기 말엽 한국의 바둑인들이 세계를 제패한 것도 일본인들의 시각을  엄청나게 바꾼 셈이다. 그것은 한국 축구가 일본 축구에 우위를 보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대체로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의 바탕은 체력적 우열보다는 정신수준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별을 받는 민족이나 인종은 어딘지 야만적이고 지능이 떨어진다는 오해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조훈현이 세계 역사상 첫 바둑올림픽 격인 잉창치(應昌期)의 첫 우승을 차지했으니 그들의 놀라움은 짐작할 만 했다. 바둑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오락으로 현대화한 것은 일본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바둑을 국기(國技)처럼 여겼고 일반인들도 바둑에 무슨 인생의 진리나 철학도 있다는 통념이었다.

물론 일본은 바둑의 기원과 상관없이 바둑의 종주국 같이 행세했고 바둑 실력도 최고라는 자신감도 깔려있었다. 그처럼 일본이 어렵사리 가꾸어 논 바둑을 조훈현이 평정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사유의 세계에서 손색이 없음을 입증한 셈이었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재일동포들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욘사마는 한국인들의 희노애락이 인류의 보편적 기준에 따른 것임을 말해준 셈이다.

같은 인종의 이민족 사이에서도 차별을 벗어나기가 그처럼 어려운 판에 인종이, 피부색이 다른 경우는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을 해소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책의 경우다.

책을 한 권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재미있는 책은 몇 시간 동안 수업태도가 좋은 학생을 앞에 앉혀놓고 어떤 인종이 더럽거나 야비하지 않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강의를 하는 격이다.

물론  그런 책들이 인종차별 같은 것을 소재로 삼을 것은 없다. 미셀의 경우도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만 썼다. 그럼에도 그의 일상을 읽는 백인들은 그들이 모르고 오해했던 흑인들의 사유의 세계에 빠져 몇 시간을 그 속에서 산책을 하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엉클 톰스 캐빈‘이 남군을 쳐부수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북군에게 엄청난 전투력을 보탠 것과 같은 이치다.

’비커밍‘은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쓴 것이 그렇다. 그는 트럼프가 남편 버락을 사사건건 괴롭히기에 화가 났으며 그들의 이취임식을 회상하며 “나는 웃으려는 시도조차 포기했다”고 썼다. 그것은 정권이 교체된 경우 반대 정당의 신임 대통령에게 흔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가 트럼프가 되고 보면 묘한 장면이 연출된다. 트럼프에게서는 여러 가지 엉뚱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총을 들지 않은 KKK 두목’ 같은 면모를 떠올릴 수도 있다. 트럼프의 주로 유색인들인 이민에 대한 적대감이 우선 그렇다. 그래선지 그의 ‘미국 제일주의’는 얼핏 ‘백인 제일주의’로 읽히기 쉽다.

그는 총을 들지는 않았으나 총기 산업을 극구 옹호하며 수차례 총기 사고가 나도 총기소유를 극력 변호한 것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비커밍’은 미셀과 오바마의 대결, 나아가 착실하고 건전한 흑인과 어딘지 요란하고 불안한 백인의 대결 같은 면모를 부각시킬 수도 있다. 그것으로 흑인은 건전하고 백인은 불안하다는 통념으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오바마의 그 성격과 콘트래스트를 이루어 새삼 흑인들의 사유가 건전함을 강조할 수는 있다.

물론 ‘엉클 톰스 캐빈’이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르듯 ‘비커밍’이 2년 뒤 그를 대선에 끌어들여 승리를 안겨줄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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