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ㆍ중 무역전쟁 격화...중국인, 키신저 前 국무장관 북경행 환호
미ㆍ중 무역전쟁 격화...중국인, 키신저 前 국무장관 북경행 환호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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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키신저 1970년대 미국과 중국 화해 이룬 외교관 평가
유대인 출신 키신저는 미중 화해, 칠레 공산 정권 붕괴 부심
시진핑의 경제스승 류허 부총리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9일 북경에서 만나 미중문제 현안 등에 대해 논의를 했다. (사진 신화통신/뉴시스)
시진핑의 경제스승 류허 부총리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9일 북경에서 만나 미중문제 현안 등에 대해 논의를 했다. (사진 신화통신/뉴시스)

 

미중 양국이 무역갈등 해결 접점을 찾기 위해 탐색전에 들어갔다.   

12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달 30일~12월 1일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에 이뤄질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따로 만나 무역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9일 무역 협상 대표들인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부 장관과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는 통화를 했다.   

미중 무역갈등의 돌파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국이 합의(accommodation)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한편 류 부총리는 통화 당일 (중국시간 10일) 베이징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만났다.

당시 그는 키신저 전 장관에게 “양국이 상호존중, 평등의 원칙에 따라 무역갈등에서 나타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중국인들은 키신저 전 장관의 베이징행을 반기고 했다, 중국인의 키신저 사랑은 남다르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의 화해를 이룬 세기의 외교관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중이다. 95세의 나이니 노구라는 말도 시원찮고 노익장이라는 말도 싱겁기만 하다. 다만 그가 중국을 다시 찾은 것은 반세기 전의 그것과 맥락이 닿는다. 1971년 그가 몰래 중국을 방문한 것이 이듬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져 중국을 죽의 장막에서 끌어냈다면 이번 방문은 두 나라 사이를 막고 있는 무역장벽을 걷어내기 위한 것이다.

키신저의 이번 방문은 개인 자격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지간한 국가원수의 국빈방문보다도 더 눈길을 끈다. 아니 국빈의 ()’손님이고 결국 이라면 중국인에게 키신저는 남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남이란, 그리고 손님이란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심하면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존재이나 중국인에게 비친 키신저는 중국인보다도 미더운 어른이다.

그는 중국에 선물을 가져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절대 재앙을 가져오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름만 들어도 항상 기분이 좋은 위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시선이 미치다 보니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한 주제를 떠나 엉뚱한데 시선이 쏠린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에게 가장 반가운 미국인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주제로 실시된 여론조사 같은 것을 접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크게 떠오르는 인물이 키신저 외에도 둘이 있다.

소설가 펄 벅(1892~1973)과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1905~1972). 그들 가운데 펄벅은 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너무 유명한 문호인데 비해 스노우는 이제 아는 사람이나 아는 존재에 가깝다. 그는 1936년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蔣介石)군에게 쫓겨 서북 변두리 옌안(延安)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찾아가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을 씀으로써 그와 홍군(紅軍)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이들 3인은 출신이 달라 인생 역정도 딴판이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정도를 넘어 중국으로 인해 거듭나다시피 한 점이다. 우선 키신저의 경우를 보자. 그가 미 중 화해를 끌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하바드 대 교수 출신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써 지금쯤은 거의 잊혀 진 존재가 됐을 것이다. 그는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겸임하기는커녕 국무장관 자리에도 앉지 못한 채 공직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 중 화해를 끌어냄으로써 그는 세계사의 거인이 됐고 그 여세를 몰아 베트남 휴전을 성사시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키신저가 화해나 평화를 사랑해서는 아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이익만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비난도 많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유태인 출신인 그에게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비슷한 DNA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를 추구하던 그 시점에도 칠레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려 부심했다. 그래서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 시켜 세계의 환호를 받은 이듬해에는 칠레에서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정권의 수뇌부가 환호할 때 지구 반대편의 동무들은 참극을 당했으나 그건 키신저가 달라져서는 아니다.

같은 해가 떠도 중국이 낮일 때 칠레는 밤이듯 그의 실리 외교가 중국에는 혜택으로 아옌데에게는 비극으로 연결된 것뿐이다. 그것은 키신저가 파리평화협정을 성사시켜 그 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도 그렇다. 그 협정으로 얻은 평화는 불과 2년 뒤 깨져 베트남은 공산화됐다. 그가 협정 체결 당시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원래 베트남을 각별히 아낀 것도 평화를 존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이익만 따진 셈이었다. 당시 미국의 이익이란 베트남전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이 베트남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가 없었던 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며 빠져 나오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부 베트남 정부에게 호랑이 꼬리를 붙들게 해 놓고 얼른 도망치는 것이 우선 떠오르는 수법이다. 파리협정은 거기에 합당한 묘수였다.

그래서 1973127일 파리협정이 체결되자 이틀 뒤에 닉슨은 서둘러 종전선언을 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많은 보트 피플이 생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막으려면 미국이 베트남의 티우 정권에게 당신네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래서 우리가 10t급 여객선을 많이 동원했으니 공산정권이 겁난 사람들은 빨리 타라고 알려야만 했다.

실은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도 중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있어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인으로 거듭나듯 그 뒤에도 중국을 챙겼다. 그래서 중국에서만은 키신저가 거룩하면서도 신명난 이름이 됐다.

그런 점에서는 에드가 스노우도 뒤지지 않는다. 키신저가 중국서 거듭난 1972년에는 중국이 원자폭탄을 갖추고 같은 공산국인 소련과 키 재기를 하듯 전투도 했던 강국이었다. 이에 비해 스노우가 중국서 거듭난 1936년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 군이 홍비(紅匪)’라고 부른 것이 억지스럽지 않을 만큼 고단한 처지였다. 바로 그해 겨울에는 장제스가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산적토벌 하듯 토벌하라고 독려하다 시안(西安)사변이 나기도 했지 않았던가.

그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다시 말해 세상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찾아준 손님이야 말로 가장 반가운 빈객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키신저가 중국을 찾아 간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장사꾼의 방문 같다면 옌안의 마오를 찾아간 스노우에게서는 어딘지 이념의 순례자 같은 분위기 같은 것이 풍겼다. 그것은 가난을 딛고 성공한 인물이 춥고 배고프던 시절 떡을 주었던 이를 두고두고 감사해 하는 것과 같은 정경이다. 홍군은 바로 전 해에 대장정을 마쳤다지만 그것은 훗날에야 기념할 역사적 서사시고 당시의 세계는 그런데 관심도 없었다.

1936년의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던가.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을 열어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함으로써 동서 양방의 강대국들에게 정신적인 선전포고를 하던 때였다. 그래서 홍군을 챙겨줘야 했던 스탈린도 정신이 없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2차 대전에서 2000만의 인명피해를 당한 소련이 아닌가. 소련이 중국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시선은 일본군과 그것을 막아선 장제스 군에서 멈췄고 그 너머의 홍군에는 미치지 않았다. 바로 그해 시안사변이 일어나 홍군이 장제스를 붙잡았을 때도 스탈린이 그를 살려 주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옌안을 찾았던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인민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노우가 당시 홍군의 제2인자였던 펑더화이(彭德懷)와 야간 산책 중 겪은 대목은 아직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야간 산책 중 초병이 누구야!”하고 수하를 하자 펑은 나 펑더화이야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초병은 동무가 펑더화이가 아니라 주더(朱德) 동무라도 암호를 대야합니다며 다그쳤다. 주더는 당시 홍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 초병은 펑더화이에게 경례도 하고 군사명령도 받지만 그가 군인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았다.

펑더화이가 일찍이 국민당 군 장교에서 공산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부터 형제들이 학살당하는 등 온갖 수난을 겪어온 백전노장이라면 그 초병 역시 대장정을 겪었다. (대장정-. 장시성 루이진을 떠날 때 10만 명이 출발했으나 옌안에 8000명이 도착했으니 생존율이 구사일생(10%)보다 못한 8%의 고난이었다)

그 병사는 막상 장군이라는 이들도 꼬리를 내릴 그 험난한 고행을 자진해서 택하지 않았던가. 그 초병은 그 무렵 국민당군 병사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원이 아닌 징병으로 군인이 됐지만 그 과정은 마치 죄수가 끌려가듯 했다. 그들을 훈련소로 싣고 가는 기차는 중죄인을 싣고 가는 화물차보다 더 벽이 두터웠고 일본군 폭격기가 날라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수백 명이 훈련도 받기 전에 곧잘 불에 타죽었다. 따지고 보면 스노우는 그 홍군들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의 모습을 전한 셈이다. 그가 옌안에서 돌아오던 시점에 시안사변이 일어났고 시안사변은 국공합작으로 연결되면서 홍군은 변화를 겪는다.

국공합작으로 옌안이 공격대상이 되지 않자 많은 이들이 옌안을 찾았다. 상하이에서 배우로 있던 장칭(江靑)도 그 중 하나였다. 마오가 부인이자 혁명 동지인 허쯔전(賀子珍)과 이혼하고 장칭과 결혼을 하려 하자 모든 동지들이 말렸다. 그럼에도 마오는 장칭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그 모습은 어딘지 혁명가가 아닌 황제의 모습을 풍겼다.

그 뿐 아니라 외지에서 온 여인들과 춤 파티가 벌어진 옌안의 풍경은 오늘날 중국의 부패상을 예고했던 것만 같다. 그것은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그 주체세력은 기득권자가 된다며 부단혁명을 강조했던 마오쩌둥의 어록을 빌리자면 혁명이 채 성사되기도 전에 그 주체세력이 기득권세력이 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저런 연유로 중국의 붉은 별중국의 미친 별(Mad Star Over China)’가 되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 때 당시 중국 지도층과 가까운 이로써 가장 가슴 아파 한 사람도 중국인이 아닌 스노우였으리라.

막상 중국인들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가해자나 피해자 대열에 말려 들 수밖에 없었으나 스노우는 그 밖에서 자신이 절친했던 펑더화이 등 정다운 친구들이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가 1972215일 별세한지 약 1주일 뒤인 221일에는 새로운 중국의 미국인 친구 키신저가 닉슨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새 시대를 열었고 중국과 친한 미국인 두 사람은 바톤 터치를 한 셈이였다. 스노우의 유해 가운데 절반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재직했던 베이징대에 묻혀 있으니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인으로 눈을 감은 셈이다.

펄 벅의 경우는 이들 두 사람과 다르다. 키신저와 스노우가 중국 수뇌부에 반가운 존재인데 반해 그는 이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가 반공을 내세워서다. 그것은 작가로써 장기간 장제스 치하의 중국에서 살아야 했던 그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서는 펄 벅이 그 무서운 허버트 후버 연방수사국장의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그는 안팎으로 수난을 당한 생애였다.

그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당시 감격에 몸을 떨었으나 중국 측의 거부로 그 일행에 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펄 벅이 중국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키신저보다도 스노우보다도 더 중국을 사랑했다. 아니 그 두 사람이 미국인으로써 한 사람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은 공산당 정권의 성향에 호감을 느껴 중국을 가까이 했다면 펄 벅은 아예 중국인으로 태어나다시피 했다.

미국서 태어난 지 3개월 후 선교사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간 그는 벽안의 중국인으로 자랐다. 따라서 그는 외국인으로써 중국의 어떤 면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으로써 그냥 중국을 썼다. 그래서 세월이 갈수록, 다시 말해 그를 사갈시했던 지난날의 지배층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수록 그는 중국 민중의 사랑을 회복해 가고 있다. 그는 지난날 중국의 암담한 현실도 아직 갈고 닦지 않았을 뿐인 대지(The Good Earth)’에서 일어난 일로 보고 그 속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은 인상적이다. 대지는 주인공인 가난한 농부 왕룽(王龍)이 장가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가라고 해봤자 한 부자 집에 가서 중매꾼이가 정해 둔 하녀를 데려 오는 정도다. 그 신부 깜인 오란의 얼굴이 못생겨 주저하는 왕룽에게 중매꾼은 이 사람아, 얼굴이 변변한 애들은 이미 다 남자가 거쳐 갔어하며 무안을 준다.

그 왕룽은 당시 중국인의 가장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결혼으로 생겨난 왕룽 일가였으나 그의 손자 위안은 애인인 메이링과 서양의 러브스토리에 손색 없는 결합을 이루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들 3인과 같은 미국인은 앞으로 좀체 나타나기 힘들다. 중국의 풍토가 변해서다. 펄 벅과 스노우는 중국인이 을이고 서양인이 갑이던 시절 갑이 갑질을 않고 을의 세계에 뛰어 들어서 생겨난 친구들이다. 따라서 키신저의 경우는 그들과 다르나 전혀 딴판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중국을 처음 갔던 시점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중국이 아니라 타이완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것으로 어딘지 지난날 제국주의 시대의 억지를 보는 듯 했다. 키신저의 방문이 결국 그 비정상을 해결해 그가 닉슨과 함께 방문했을 때는 중국이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는 미리 선물을 보낸 셈이었다. 그 키신저의 새 중국 방문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냉정한 키신저가 막연히 옛정을 호소하러 간 것은 아니다. 그의 냉정한 정치관은 도널드 트럼프와도 죽이 맞는 편이다. 더욱이 트럼프의 유태인 사위로 백악관 수석 보좌관으로 있는 제러드 쿠슈너와는 혈통상의 인연도 있다.

키신저가 큰 업적을 남기면 중국인들은 환호할 것이다. 키신저의 노력도 무색하게 미 중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미워하면서 그와 콘트래스트를 이루는 키신저를 더 그리워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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