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기자가 만난 인물] 킥복싱 전설 최광진, "50대 격투가 꿈, 링 위 오른다"
[조나단 기자가 만난 인물] 킥복싱 전설 최광진, "50대 격투가 꿈, 링 위 오른다"
  • 조나단 기자
  • 승인 2018.11.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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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진 "과거 137전 125승 12패 전적, 자만심에 올라간 마지막 무대 후회"
현 강남킥복싱 '펀짐' 관장, 51세 나이 선수 복귀 추진...나이는 숫자에 불과
내년 4월 일본서 오프닝 매치 가질 예정, 9월 한국서 고별 경기 가질 계획
최광진 "승패는 상관 없다. 최선을 다하겠다" 스포츠맨 정신 다짐

한국의 격투 산업은 죽었다. 격투 산업은 업계 특성상 선수의 노력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 물론 슈퍼스타는 탄생한다. 현재 한국 격투 업계는 선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얼굴을 알리며 큰 사랑을 받은 추성훈, '코리안 좀비'로 UFC 옥타곤 무대 위에 오르는 정찬성, 무대 위에서 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스턴 건' 김동현 등이 있다. 하지만 일선에서 물러났다. 방송 활동을 하거나 링, 옥타곤 무대 위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본지는 한국 격투기의 전성기를 이끈 한 남자를 만났다. 최광진 선수다. 137전 125승 12패의 전적을 갖고 있다. 그는 과거 수많은 선수들을 물리치고 왕좌에 올랐다. 현재 그는 일선에서 물러서 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후진을 양성하는 관장이다. 올해 쉰하나의 나이다. 그는 아직도 '링위의 왕'을 꿈꾸고 있다.  내년 4월 일본에서 오프닝 매치를 갖는다고 한다.

그는 "챔피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마지막 경기를 가졌을 때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던. 너무 물렀던 나 자신이 아쉽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한다. 그래서 바뀌고 싶었다."라고 했다. 

사각의 링위에 선 그는 나이든 킥복서가 아닌, 야성이 살아있는 라이언킹이었다.  쉰 하나. 새로운 도전에 나선 킥복서 최광진 선수의 백세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알아본다.

 

-반갑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자면 

▲ 이제는 체육관 관장이 입에 편하게 달라붙었을 최광진이다. 60-70년대 한국에 처음 들어온 무에 타이·킥복싱을 습득한 스승에게 배운 1.5세대~ 2세대 사이에 있는 무에 타이·킥복싱 전문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인터뷰가 들어와서 조금 놀랍다. 그런데 부담은 없었다.  

 

 

-무에타이, 킥복싱이 그 시대에 처음 넘어왔다니 놀랍다. 사실 무예타이의 경우 2000년대 초 <옹박>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나서야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알았다. 

▲ 맞다. 사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술 혹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 한국에 처음 들어왔고 그때 당시 무술을 하던 많은 체육관 관장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던 무예, 운동, 무술 등을 곁들어 신문물을 배우고는 했다. 그렇게 배웠던 스승을 따라 84년도에 처음 킥복싱에 입문하게 됐다. 내 스승이 1세대 전문가, 관장이었으니 난 저절로 1.5세대 혹은 2세대로 볼 수 있다. 그때 처음 킥복싱을 입문하고, 약 10년 정도 선수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는 엄청 성공한 케이스다. 비슷하게 시작한 선수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중 최고인 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정도니 말이다. 

▲ 전적을 잠깐 말해보자면 사실 그때 당시엔 대회나 경기들이 모두 토너먼트 형식을 갖고 있었다. 대회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대회를 하면 하루에 많게는 다섯 경기, 여섯 경기까지 했다. 지금 선수들이 들으면 기겁한다. 한 번 이기기에도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 하고 운동도 그만큼 더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경기를 치러 네 경기, 다섯 경기를 이겨야 우승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운동이 나한테 잘 맞았는지 나갈 때마다 상대를 꺾고 이길 수 있었다. 그땐 체력도 좋아서 수많은 경기를 가졌다. 그땐 몰랐는데 들어보니 토너먼트로 치렀던 경기를 모두 한 경기를 가졌던 걸로 쳐주더라. 그래서 내 전적이 137전 125승 12패가 됐다. 그중에서 대부분의 패배는 일본에서 가진 경기에서 이었다. 일본은 3번 정도 갔었고, 홍콩에도 갔었다. 지금은 한국에 남아 관장일 만하고 있는데, 아직 꿈이 하나 남아있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다시 한 번 무대 위 링에 올라가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준비 중이다. 

 

- 화려한 복귀, 혹은 데뷔 전임과 동시에 은퇴전이다. 

▲ 젊은 선수들이 보기엔 웃음거리일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모습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년배 관장들은 좋아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이기던 지던 끝맺음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지금과 그때,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 그렇다. 지금에 들어서야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당시만 하더라고 일본과는 10년 태국과는 15년 이상 차이가 났다. 일본과 태국의 경우 큰 차이는 없지만 이들 나라들과 우리나라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일본은 격투 산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기술을 배워 가리키는 것보다 종주국 태국에 전문가 혹은 코치를 초빙해 선수들을 육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한국 선수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일본 선수를 초빙해 경기를 할 때 승률이 높다는 게 놀랍다. 대중의 관심은 열악하지만 승리를 위한 깡다구? 나 파이팅이 넘친 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엔 동양이 체형이 61.5kg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그 체급에 선수가 제일 많았다. 지금은 70kg 대가 동양인 체형으로 바뀌었고 선수층에 제일 두껍다. 그러다 보니 전적이 많은데 지금은 토너먼트 식으로 시합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부상을 입을 확률도 높아질뿐더러 선수 생활을 함에 있어서 좋지 않은 영향이 있기 때문.  

 

- 운동을 시작한 이유 혹은 계기가 있을까 

▲ 사실 운동은 초등학교 중학교 들어서면서 다양하게 배웠다. 킥복싱을 배운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다. 처음 대회에 출전했을 때 나이가 18살이었다. 어리다 보니까 사실 마음가짐이 상대를 보면 무섭고 그랬다. 그런데 이게 어리다는 것이 확실히 다른 것이 경기 전후로 혹은 경기 중간에도 소모된 체력이 빨리 회복된다는 점이다. 특히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를 기다리는 그 쉬는 시간에 체력 회복이 엄청 빠르게 된다. 말이 잠깐 사는데, 지금이랑은 다르데 그때 당시엔 많은 체육관이 있어서 이것저것 배웠다. 사실 체형이 큰 체형이 아니다 보니 싸움을 잘 하고 싶어서 배우게 됐다. 유도, 태권도, 검도 등 다양하게 배우다가 우연하게 킥복싱을 접했고, 운동을 하니까 나랑 너무 잘 맞더라. 진짜 딱 맞는 정장을 입은 듯 한 느낌이었다. 이건 몸을 다양하게 쓰기 때문에 싸움을 할 때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너무 나랑 잘 맞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 그러던 중에 관장님의 추천으로 시합을 나가게 됐다.

 

그런데 또 시합에 나가니까(토너먼트) 계속 이기고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한 번만 이겼으면 크게 감흥이 안 왔을 텐데 그 이후로도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대를 모두 다 꺾고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1년에 적으면 15경기 정도 많으면 20경기 이상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10년 동안 130전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 독이 됐다. 나갔다 하면 우승을 하고, 주변에서도 날 알아봐 주고 하다 보니까 자만에 빠졌었다. 그래서 대다수에 패배는 그때 한 것이다. 운동도 하지 않고 타이틀전을 갖거나 경기를 치르다 보니 신인들한테도 패배를 하는가 하면, 일본 선수들에게도 패배했다. 그러던 중 92년도에 체육관을 차리게 됐다. 그렇게 선수도 하고 체육관 관장도 하다가 어느 순간 선수로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체육관 관장으로서 활동량을 늘렸던 것 같다. 94년도에 무에 타이 대회가 서독에서 열렸는데, 우리나라 대표로도 뽑혔다. 그런데 10일이라는 시간 동안 체육관을 비워야 하니까 마지막에 가서 포기하게 됐다.  

 

- 패배는

▲ 선수로서 제일 마지막 경기를 가졌을 때 패배했다. 그래서 마지막 경기를 가진 선수와 리벤지 매치를 가지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지금은 거의 90kg 가까이 몸무게가 불어서 리벤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한 체급 정도면 모를까 그 이상이면 아무래도 차이가 난다. 내가 살을 찌울 수도 없고, 그 선수도 살을 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못 하게 됐다. 

- 부상을 당한 적은 

▲ 복싱 같은 스포츠는 주먹을 사용하다 보니 머리를 다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킥복싱 무에 타이 같은 경우엔 발을 많이 사용하니까 머리는 다치는 경우가 드물다. 다친데 가없지는 않은데, 주로 일본 선수들과 경기를 가지면 많이 다쳤던 것 같다. 일본에 가서 무릎으로 맞아 코가 휘어지는가 하면, 엘보로 턱을 맞아서 턱이 돌아가고 그랬다. 한일전에서 오는 파이팅 때문일까. 유독 일본 선수와 경기에서 부상이 많았다. 한 번은 한 체급 위 선수와 경기를 가졌는데, 내가 파고들어서 타격으로 그를 이기자 리벤지 매치를 이야기하고 자리를 떠나더라 한동안 연락이 없어 수소문해보니 태국으로 넘어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4개월 뒤 인가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온몸이 까맣게 타서 왔다. 물어보니 태국에서 4개월간 니킥을 배워왔다는 것이다. 내가 파고들지 못하게. 그런데 리벤지 매치 도중 내가 파고들다가 니킥으로 갈비뼈를 맞아서 갈비뼈가 금이 간 적이 있다. 그 경기에선 아쉽게 패배했다. 

 

그는 지금 일본의 한 대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가 됐다. 그처럼 한곳에서 매진하면 나중에 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한 단체를 이끄는 장이 될 수도 있는 시장이 형성되면 우리나라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일본의 경우엔 관객들의 모습이 정말 다르다. 일본 관객들은 국적이 달라도 진짜 선수에겐 손뼉 쳐주는 문화가 있다. 내가 7번 쓰러져도 8번 일어나니 나중에는 모두 기립 박수를 쳐주더라. 관객들도 많고 그들만의 문화가 부러운 적이 있다. 

- 기억에 남는 경기는 

▲ 일단 제일 마지막 경기다. 왜 기억에 남느냐면 내가 운동을 전혀 안 했다. 92년도에 선수를 그만뒀는데 94년도에 광주서 시합 한 번 뛰어 달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아니 한동안 운동도 안 했다. 뭘 어떻게 나가느냐"라고 그랬는데 주최 측에서 "그 시절 최고의 챔피언 어디 가냐"라고 한번 와서 잠깐 뛰라 해서 준비도 없이 링 위에 올랐었다. 그래서일까, 내 자만심 때문에 진 것 같다.  

이어서는 91년도 3월이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그 달에 두 번의 무대를 올랐기 때문이다. 16일 날 수원실내체육관에서 31일 날 문화 체육관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 달에 두 번의 큰 대회를 가지기도 했고, 한일전 타이틀 매치여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  

16일 시합을 하고 이 주 만에 했는데 그땐 원 매치를 했었는데, 1라운드에 라이트스트레이트 한방에 떨쳐서 이겼고, 31일 경기는 일본에 한 체급 위 선수를 불렀서 가진 경기였었는데 그때도 또 이겼다 그달에 두 번 큰 대회였으니까 한일전에 타이틀매치라 그래서 그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 부상을 당했을 때 했던 재활은? 

▲ 당시엔 병원 같은 걸 생각도 안 했다. 그냥 운동 쉬고, 한 달 정도 있으니 저절로 치료가 되더라. 지금에서야 어디 다치면 병원 가겠지만 당시엔 생각도 못 했다. 뭐든 간에 자연치료가 다 된다. 운동 열심히 하면.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주먹이 운다'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웃으면서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그 아쉬움이 크기 때문에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은 것일까. 

▲ 맞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마지막 경기를 뛰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당시에 선수 생활을 했던 지금에 관장 혹은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지금도 만나면 내 마지막 경기 이야기를 하곤 한다. 94년도 광주에서 열렸던 마지막 경기를 말이다. 당시에는 패배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패배에서 오는 여파가 큰 질 몰랐다. 앞서 말했지만 자만했었고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사람이란 것이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이 계속 이기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마지막으로 경기를 준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이기던 지던 라스트 매치를 해보고 싶다. 그래서 비록 지더라도 웃으면서 떠날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 중이다. 

 

- 한일전의 경우 부상도 많을 것 같고 살 떨리는 느낌이다. 

▲ 지금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기술을 많이 전수받고, 전보다 향상되어 일본 선수들과 경기를 가지면 많이 이기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A급 선수들 같은 경우엔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에 비해서 더욱 철저한 관리와 전문가를 초빙해 구단을 관리하고 선수들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좀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충분히 성장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향후 목표는  

▲ 일단은 내년 4월에 일본으로 넘어가 링 위에 한 번 올라갈 생각이다. 그리고 은퇴경기의 경우 내년 9월경에 갖는 것이 목표다. 그 모든 일정이 다 끝난다면 그 이후엔 일단 후학 양성이 목표. 그래서 협회에 무에 타이 협회의 이사로 올라가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됐으면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체육관의 회원이 지금도 많지만 좀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서울 강남이다 보니 회원도 많고 세가 비싸다. 많은 관객들이 찾아 주셨으면 한다.  예전에 체육관 하면 냄새나고 그런 걸 생각했을 텐데 여길 와보면 알겠지만 냄새는 전혀 안 나게 하고 깔끔하게 운영 중에 있다 그래서 운동복도 제공하고 있다. 지금은 다이어트를 하러 오는 회원들이 많기 때문에 머리카락이나 여타 그런 것들을 최대한 깨끗하게 환경을 만들고 회원들이 재밌게 운동할 수 있게 기술을 가르치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신경을 쓰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 

최광진 관장

통합전적 137전 125승 12패

주요전적

84년 전국 킥복싱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준우승

84년 전국 킥복싱 대회 웰터급 (토너먼트) 우승

85년 전국 킥복싱 신인왕전 웰터급 (토너먼트) 우승

85년 킥복싱 골든 글러브 대회 웰터급 (토너먼트) 우승

85년 전국 킥복싱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우승

86년 골든 글러브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우승

86년 전국 킥복싱 대회 웰터급 (토너먼트) 준우승

86년 전국 킥복싱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우승

87년 킥복싱 한.미.일.태 국제전 라이트급 우승

87년 전국 킥복싱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우승

88년 전국 킥복싱 대회 라이트급 (토너먼트) 우승

88년 6월 일본 원정 경기 전일본 킥복싱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

88년 킥복싱 6체급 평가전 웰터급 우승

89년 한.일 킥복싱 국제전 라이트급 우승

89년 8월 홍콩 원정 세계 킥복싱 국제전 출전

90년 랭킹전 라이트급 1위 우승

90년 한.미.일.태 국제전 라이트급 우승

91년 1월 일본 원정 경기 전일본 킥복싱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

91년 3월 킥복싱 라이트급 한국 챔피언 획득

91년 3월 한.일 킥복싱 국제전 웰터급 우승

 91년 9월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전 성공

91년 10월 일본 원정 세계 킥복싱 대회 출전

92년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전 성공

92년 한.태 킥복싱 국제전 우승

93년 킥복싱 라이벌전 우승

그 외 다수 우승

 

전) 대한 격투기 총 연맹 사무총장

 현) 대한 무에타이 협회(중앙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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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2021-06-22 21:32:28
우와 멋잇으심

오요나단 2018-11-10 20:08:30
펀짐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