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평의 시사논평]아르헨티나의 ‘레프트 탱고’ 트리오- 페론·게바라·프란치스코
[양문평의 시사논평]아르헨티나의 ‘레프트 탱고’ 트리오- 페론·게바라·프란치스코
  • 양문평 고문
  • 승인 201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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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은 새삼 놀랍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고 그 가능성도 ‘available’(이용할 수 있는)이라는 다소 애매한 단어로 집약돼 있으나 놀라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을 보는 눈도 여러 각도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를 주시하는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에서 배출한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교황과 공통점이 있어서다.

그 인물들이란 군인이자 정치가로 두 차례나 대통령을 역임한 후안 도밍고 페론과 혁명가 체 게바라다.

무슨 공통점이 있느냐고? 모두가 좌파적이랄까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점이다.

후안 페론은 일찍이 대령 시절인 1943년 보수적인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 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에 참가함으로써 진보적 노선을 걸었으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국방부 장관을 거쳐 노동부 장관이 된 그는 ‘노동공산주의’를 의미하는 생디칼리즘을 추구해 노조 내부의 생디칼리즘 세력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데 앞장섰다.

그 뒤 부통령이 된 페론은 1944년 배우인 에바 페론을 만나면서 그의 ‘레프트 탱고’는 듀에트로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 때도 좌파 정권은 미국의 눈에 가시였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페론은 감옥에 갇혔으나 에바의 맹활약으로 석방됨은 물론 그 여세로 1946년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페론주의’가 날개를 단 것이다.

에바는 그런 좌파적 페론주의의 아이콘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농장주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무작정 상경해 사회의 밑바닥을 헤매며 오직 아름다운 몸매 하나만을 밑천으로 연예계에서 성장했다.

따라서 그가 이 남자의 품에서 저 남자의 품을 전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런 전력이 미국과 그들의 앞잡이 거부들의 수탈로 고통 받던 민중들에게는 ‘더러움’이 아니라 ‘아픔’으로 다가가 그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그런 퍼스트레이디가 앞장서 서민을 위한 정책을 폈으니 그 열광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정책은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좌파 또는 진보 정권들이 흔히 듣는 비난인 ‘포퓰리즘(대중주의)’이라 할 수 있다.

포퓰리즘의 근원은 로마시대에 까지 소급하지만 오늘날 좌파정부를 비난할 때 동원되는 포퓰리즘은 그 기원으로 페론 정권을 지칭하는 게 상례다.

페론 부부는 1952년 정부통령에 당선돼 그들의 레프트 탱고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지만 그것은 꽃이 만개한 것으로 시들기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시든다’는 말도 무색하게 급속도로 내리막을 달렸다. 바로 그해 에바는 병사하고 페론주의 정책도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래서 3년 후에는 페론도 쿠데타로 정권을 뺏겨 망명해야 했다.

망명한 페론은 파나마에서 이번에는 무용수 출신인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이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1973년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 페론은 병사하고 이사벨 페론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첫 여성대통령이라는 장식이 무색하게 이사벨 페론 대통령의 앞길은 험난했다.

대통령의 유고에 따라 부통령으로써 승계했다고는 해도 그의 대통령 취임 자체가 논란과 비난을 받았다. 대통령으로써의 첫걸음부터 뒤뚱거린 것이다.

물론 무용수 출신인 그의 능력도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타개하는 데는 무용했다.

결국 그는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주도한 쿠데타로 망명해야 했다.

그래서 페론의 경우는 오늘날도 우파들은 좌파정권의 정책을 비난할 때 포퓰리즘의 샘플로 지목하며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거기에는 반론도 많다.

페론은 빈부격차를 줄이려 애썼지 경제개발에 주력하지는 않아 경제를 망칠 수도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오히려 비델라의 군사정권이 미국의 주문에 맹종해 무분별하게 외자도입을 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화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논쟁은 물론 정답이 없고 몇 년에 걸쳐 논쟁을 벌여봤자 결판이 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어지러운 속에서도 에버 페론이라는 아이콘은 꿋꿋이 생명력을 누렸다.

그는 아이콘으로 태어나 아이콘답게 죽은 셈이다. 그가 3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이 인간으로써는 불행이지만 아이콘으로써는 정답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페론의 부인이 된 이사벨 페론과 대비해 볼 때 특히 그렇다.

이사벨은 대통령 자리에도 앉았고 87세가 된 아직도 살아 있지만 적어도 아이콘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우선 쿠데타를 몸으로 겪어 자택연금을 당하는가 하면 재임시절의 짧은 대통령 재임 시절의 부패문제로 기소됐다가 가석방돼 스페인에 망명했고 그 뒤에도 재임시절의 의문사 문제로 스페인 법정에 출두하기도 했다.

반면 삶의 절정에 그리고 페론의 통치에 먹구름이 끼기 전에 사라진 에바는 아르헨티나 민중의 가슴에 살아 있다.

1978년 미국 브로드웨이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는 그 아이콘에 영원한 생명을 넣은 셈이다.

‘오페라의 유령’으로도 유명한 이 거장은 이사벨이 마악 정권을 잃고 한참 시달리던 시점에 에바의 영전에 너무 좋은 선물을 한 것이다. 이 노래는 에바의 애칭인 ‘에비타’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노래를 배우와 무용수 출신인 두 여인의 운명에 투영해 보면 정반대의 메아리가 들린다.

에비타에게 이 노래의 제목은 절반만 맞다. 아르헨티나 민중은 에비타의 ‘당부’와는 달리 그를 위해 울고 있으며 에바는 자신의 말처럼 그들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들은 이사벨을 위해서는 울지 않았고 이사벨은 그들의 마음에서 떠났다.

한편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좌파의 아이콘 체 게바라에 이르면 모든 설명이 진부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그 점에서 굳이 그를 언급할 것이 있다면 아직도 그가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들을 깨우쳐 주는 정도다.

그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그가 간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게바라가 쿠바 혁명의 영웅답게 쿠바나 그가 일시 머물었던 멕시코, 아니면 마지막 숨진 볼리비아 태생으로 알고 있다.

길고 긴 남미 대륙의 남쪽 끝 나라에서 태어나 대륙의 북쪽 끝에서도 배를 타고 더 올라가야 하는 섬나라에서 파란을 일으킨 것이 그렇듯 게바라는 에비타처럼 콘트라스트가 너무 선명한 삶을 살다 갔다.

에비타와는 대조적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그가 청진기 대신 총을 잡은 것이 우선 그랬다.

남미에서 의사가 좌파 혁명에 뛰어든 이는 게바라 외에도 있다.

게바라가 미국CIA의 공작으로 붙들려 총살당한지 3년 뒤 칠레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도 의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혁명이 아니라 선거로 당선돼 정치적 개혁으로 칠레의 부조리를 없애려 한 점에서 게바라와는 딴판이었다.

다만 그 역시 CIA의 공작으로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당해 총격으로 죽었으니 남미 좌파의 길은 그게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비타와 게바라는 공통점도 많다.

게바라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 우선 그렇다.

그 점에서 에비타가 이사벨과 대조되듯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대조가 될 수 있다.

게바라와 쌍두마차를 이루어 쿠바혁명을 달성한 카스트로는 90세의 수복을 누린 대신 혁명가로써는 치욕스러운 ‘늙은 독재자’라는 험담을 들어야 했다.

좌파 정권이 대부분 그렇지만 쿠바는 미국의 바로 옆에서 그들의 압력을 받아 경제는 시들고 그러다 보니 그는 혁명의 이상과는 딴판의 인권유린도 마다할 수 없었다.

게바라는 쿠바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쿠바를 떠났고 아마추어 혁명가의 한계가 바닥이 나기 전에 저세상으로 갔으니 아이콘으로써는 너무 행운이었다.

그가 죽은 다음해 파리에서 1968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자연스레 좌파혁명의 아이콘이 됐고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일찍 죽음으로써 아르헨티나도 쿠바도 아닌 세계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떨까?

그를 이 아르헨티나의 좌파 트리오에 포함시키는 데는 주저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신성한 아우라에 둘러싸인 듯 한 교황이 앞의 두 사람과 너무 거리가 멀어 보여서는 아니다. 전세계 우파의 정신적 지도자격인 교황에게 ‘레프트’란 용어가 부적절한 정도를 벗어나 신성모독처럼 비칠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남미 최초의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남미의 아이콘 같아서였다.

남미-. 성당의 경건한 종소리가 빠짐없이 울려 퍼지며 사랑을 호소하는 유일한 대륙.

그 한편에서는 쿠데타의 손길도 빠진 곳 없이 죄어들어 비명이 그치지 않는 대륙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치 예수가 로마의 지배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듯 그 대륙에서 태어나 교황이 된 것만 같다.

그는 다른 교황들보다 혁명이나 해방이라는 말에도 훨씬 가까운 환경에서 사제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교황이라면 상을 찌푸리거나 적어도 시큰둥할 법한 해방신학이나 해방신학에 몰두하는 사제들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는 문재인을 만나 북한 방문 용의를 전하기 4일 전인 10월14일 엘살바도르에서 군사독재에 피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시성했다.

2013년 프란치스코가 교황에 즉위한 이래 시성을 승인한 892명 가운데 오스카 로메로 성인이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군부 독재에 항거한 그의 삶이 너무 장대해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그의 시성 절차를 서둘렀다.

로메로의 시성을 두고 가톨릭의 일각에서는 그가 순교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서 피살됐다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웃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교회에 대한 증오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순교로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것"이라면서 시성을 관철했다.

그것은 불교식으로 보면 ‘대승 가톨릭’의 면모를 보인 것으로 그는 이제 남미의 가톨릭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셈이다.

프란치스코는 그 시성식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중 피격당할 때 둘러서 피가 묻은 로프 벨트를 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눈에 그는 로메로 주교의 열렬한 숭배자이자 그의 분신처럼 비친다.

그런 프란치스코가 북한 방문에 긍정적 답변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지구에서 한반도와 정반대의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나 아마도 한반도의 비극이 발생한 원인에서부터 그 경과까지 너무 잘 알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이들 아르헨티나의 3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도 같고 너무 닮은 것도 같다.

물론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특이한 토양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게바라는 조국을 떠난 이래 연이 끊어진 셈이었고 프란치스코는 남미의 성직자로 시종했다.

아르헨티나의 한 특색이라면 남미 치고는 백인의 비율이 유난히 많아 97%나 된다. 같은 남미의 대국인 브라질의 경우 백인이 47%이고 혼혈족인 물라토가 43%나 되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생애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르헨티나의 상징이랄 수 있는 탱고 음악도 그렇다. 하긴 그 음악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에서 가난한 선원들이나 이민자들에게서 태어났다지만 이들 3인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남미를 넘어 세계의 음악이 돼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들의 삶에서는 어딘지 경쾌한 탱고 음악의 선율이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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