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구본무회장, 찬란하고 빛났던 화담(和談)의 生
LG 구본무회장, 찬란하고 빛났던 화담(和談)의 生
  • 이남경
  • 승인 2018.0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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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론 냉철한 승부사로, 직원에겐 온화한 리더로
- 대기업 총수의 편견을 바꾼 베풂의 의인, 고 구본무 회장
故 구본무 LG 회장
故 구본무 LG 회장

 

화담(和談) LG 구본무회장이 20일 오전 9시 52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1995년 물러나면서 LG그룹 3대 회장에 올라 23년간 그룹을 이끌었다.

구 회장은 194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5년 간 교직생활을 마치고 부친의 부름에 1975년 LG에 입사했다. 이후 43년간 LG그룹을 이끌기 위한 최고 경영가치로 '정도(正道)의 경영'을 삼았다. 이는 기업이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윤리성을 갖춰야 결국 일류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 아울러 편법과 불법으로 1등을 해야 한다면 1등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이끈 LG그룹은 2000년대 초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하며 지배구조를 개선했다. 이후 창업 때부터 동업관계였던 GS그룹, 친척인 LS·LIG그룹 등과 계열 분리를 단행하며, 전자와 디스플레이·화학·통신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나갔다.

'和談의 일생: 기업에겐 냉철함, 직원에겐 온화함'

구 회장은 LG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냉철함을 보였다. 그는 평소 철학과 같이 아무리 사소한 약속일지라도 시간을 꼭 지키고, 공식행사나 사적인 약속에 상관없이 늘 20~30분 먼저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렸다. 아울러 아무리 바쁜 상황에서 갓길운전이나 약간의 위반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평소 사람을 대할 때도 냉철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온화함’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직원들의 신뢰를 얻었다.

특히 10여년 전 금융 위기 시절 그는 대규모 적자를 떠안고도 인위적 감안을 시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라며 눈앞의 이익보단 직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그의 회장 취임 후 ‘노사 분규’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협력업체와의 관계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에 그는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 끈끈한 기업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和談의 일생: 대기업 총수의 편견을 바꾸다'

그는 평소 권위주의와 담을 쌓고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런 이미지로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편견을 바꿔버린 인물.

대표적으로 그는 불필요한 격식을 싫어했다. 저녁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주요 행사참석이나 해외 출장 때 비서는 꼭 필요한 한 명만 수행하도록 했다. 아울러 주말에 있는 지인의 경조사 등 사적인 일에는 비서 동행 없이 혼자 다니곤 했다. 뿐만 아니라 LG그룹이 매년 개최하는 인재유치행사에 참간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해주며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같이 찍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큰 딸과 아들의 LG전자 상무의 결혼식도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루길 원했다. 이어 LG 경영진에게도 작은 결혼식을 권유했다. 또한 신문에 회사 직원들이 부고 내는 것도 금지하고, 협력업체에서 경조금도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고위 인사들에 의하면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써오며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和談의 일생: 베풂의 의인(義人)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것'

구 회장은 어머니인 故 하정임 여사의 “남들에게 베풀며 살라”는 뜻을 받들여 실천했다. 이에 LG복지재단,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학원 등 복지, 문화, 교육 분야의 공익재단 이사장 및 대표이사로 사회공헌에 투자하며 남다른 열정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으로 사회를 돕고자 했다. 이에 ‘LG의인상’을 만들며 소방관·경찰관·고교생·크레인 기사·선장 등 72명에게 전달했다. 아울러 강원도 철원의 총기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15년 비무장지대 지뢰사고를 당한 병사에 사재를 내어 도움을 전했다. 특히 16년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앞으로도 (박 정부때처럼) 명분만 맞으면 정부 요구 돈을 낼 것이냐’는 질문에 “불우이웃을 돕는 일은 앞으로도 지원하겠다”라는 소신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이어 구 회장은 대학교수들을 선발해 1년간 해외연구를 지원하는 '연암해외연구교수 지원사업'을 지속하며 후원해왔다. 특히 외환위기 당시 환율 상승으로 해외 연구 지원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는 젊은 대학생들의 꿈을 향한 도전도 응원했다. 1995년 'LG 글로벌 챌린저'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생들에게 해외 로 나가 현장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현재 이 프로그램은 1995년 시작해 총 759개 팀, 2896명의 대원들이 66개국 884개 도시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런 베풂과 함께 그가 사랑했던 것이 있다. 바로 새와 숲이다.

그의 새와 숲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새 울음을 듣거나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새 이름을 척척 맞혀 '새 박사'로 유명했다. 아울러 LG 트윈타워 빌딩 집무실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여의도 밤섬 새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특히 2000년 조류학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조류도감인 '한국의 새'라는 책도 펴내며 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고인은 "후대에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남기고 싶다"며 1997년 12월 국내 최초로 환경 전문 공익재단인 LG상록재단을 세웠다. 이 공익사업으로 경기도 곤지암에 자신의 아호인 '화담(和談: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을 따와 ‘화담숲’을 조성했고, 5만여 평 규모 '화담숲'의 수목 보전과 연구 지원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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