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육사 2기로 다시 졸업, 국군장교로 충직한 군인 생활
한국육사 2기로 다시 졸업, 국군장교로 충직한 군인 생활
  • 김길홍<언론인·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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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대통령 광복 후 육군 장교시절(중)

46년 해방조국에 돌아와 국방의 간성이 될 것 다짐

19458월 만주에서 해방을 맞은 후 중국 베이징에서 광복군 제3지대 중대장 보직을 받은 28세의 초급장교 박정희는 464월 중국 텐진(天津)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 조국으로 돌아왔다.

나라 잃은 설움에 분개하고 방황하던 청소년 시절 일제치하에서 보통학교, 사범학교 교육을 받았던 박정희는 만주군관, 일본육사를 전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시대 보통사람들이 겪었던 고통과 분노를 안으로 삼키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만 생명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참담한 현실을 거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권상실과 강대국의 점령을 혈혈단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해방후 광복군으로 변신해 조국에 돌아온 갓 서른의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학하면서 사람이 달라졌다.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관동군 등 20대 중반 혼란스러웠던 다민족의 만주사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박정희는 훨씬 어른스러워져서 한국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박정희는 만군출신의 유연성과 일군 출신의 원칙주의를 경험했다. 육사 2기생 가운데 현실적 처세와 적응에 익숙했던 만군출신 장교들이 국군창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번째 사관학교에 입교한 생도 박정희는 다른 생도들보다 나이가 두세살 많았다. 2기 동기생으로 같이 입학한 260여명의 생도 중 국군, 만주군, 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학생이 35명이나 됐다.

그중의 한사람인 생도 박정희는 나이와 경력면에서 최상급의 수준이었지만 생도중대장 조병건, 오일균, 정위 등은 일본육사출신으로 나이가 8~9세나 어렸다. 나이 어린 중대장 밑에서 같은 부대에 속했던 심흥선(전 총무처장관), 손희선 등과 함께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대열의 맨뒤를 뛰어 다니면서 훈련을 받았다.

육사 2기생으로 불리우는 박 대통령의 동기생 구성원을 살펴보면 해방후 모순투성인 한국국군의 창군과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조선 경비사관학교 2기생들은 박정희를 필두로 한 엘리트그룹이 3분의 1, 나머지는 보통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분류됐다.

일본군에서 기병대 말을 관리하던 마부, 글도 제대로 못쓰는 하사관들이 부대장 추천으로 입교한 생도도 있었다. 2기생인 박중근은 박정희 등 엘리트 그룹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독립이라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방후 다시 태어난 본래 박정희의 사상과 이념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런 사명의식이 투철했기에 생도 박정희는 친구와 후배가 교관이라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단기 코스의 군사 교육을 열심히 받아 우수한 성적(3)으로 4612월 졸업했다. 일본군 중위였던 박정희는 4612월 서른살에 소위로 임관되어 조국 대한민국 육군 춘천 8연대로 배속 받았다.

1937년 대구사범을 졸업한지 10년만에 국군소위의 떳떳한 계급장을 달았다. 해방과 광복의 혼란기에 미군정의 지휘를 받긴 했지만 박정희 소위는 청운의 뜻을 다시 세우고 새로운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만 29세였으니 앞길이 도도하고 창창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거친 군인의 길 행복한 가정과 자신감 넘쳐

중위 박정희는 475월 춘천 8연대 작전참모 대리를 거쳐 바로 대위로 진급, 조선 경비사관 학교 제1중대장을 맡아 제5기 교관으로 후배 생도들을 교육했다.

▲ 박정희 대통령 부부는 대구시 삼덕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으로 박정희는 신혼 닷새만에 강원도 전선으로 투입됐다(1950.12).
48년 다시 소령으로 진급해 14연대 반란군토벌사령부 작전장교로 부임했으나 그해 여순반란사건 직후 숙군수사 때 11월 남로당 가입혐의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49년 무기징역과 파면을 선고 받았으나 백선엽 등의 신원보증과 구명운동으로 10년 감형과 형집행 정지를 받아 풀려났다.

그후 육군정보국 전투정보과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6.25 반년 전 북한의 남침 도발 가능성을 지적한 적정(敵情)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다는 사실이 최근 김종필 전총리 회고록을 통해 알려졌다. 이 때 육사 8기로 졸업한 김종필 소위와 같은 부서에 근무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문관 박정희는 506.25전쟁 발발후 소령으로 복직하여 요직인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임명됐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중인 1936419살 때 부친의 강요로 김호남과 결혼했으나 1년여만 동거한 후 1950년 이혼했고 슬하에 딸 박재옥(한병기 전대사 부인)을 두었다. 가족의 강요로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한 박정희의 초혼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6.25 전쟁 중인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해 국군 9사단(사단장 장도영)이 창설돼 참모장으로 북한군과 일선에서 직접 싸웠다. 전쟁의 와중에 박정희 중령은 5012월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초대 대구시장 허억의 주례로 25세의 신부 육영수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결혼식 사진에서 최호(군장교), 두용규(사범동기), 육예수(신부 여동생), 장봉희(김재춘 중령 부인), 김종평(9사단 부사단장), 조카 박영옥 여사, 장모 이경령여사, 백형 박동희, 신부의 외사촌 송재천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신혼 5일만에 혼자 강원도 9사단사령부로 돌아온 박정희는 514월 대령으로 진급해 한국 육군 엘리트 지휘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51년 대구의 육군 정보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등을 거쳐 53년 전남 광주의 포병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6.25전쟁이 휴전되기 직전인 53군단 포병단장 보직을 받고 3군단 포병단을 이끌고 강원도 양구 최전선으로 이동했다. 522월 부인 육영수여사는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큰 딸 근혜양을 출산했다.

6.25전쟁이 끝난 53년 육군 준장으로 별을 단 박정희장군은 본격적으로 국군지휘관의 다양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연합국으로 참전한 미육해공군의 전투 및 군지휘 방법은 엄청나게 달랐다.

박정희 준장은 만주군관, 일본육사 졸업 후의 풍부한 경험의 병영생활과 6.25참전의 다양한 전투 등을 감안 할 때 당시 군부내에서 능력과 신망을 우수하게 평가했으며 상관들의 주목을 끌었다. 반면 경쟁자들은 4811월 숙군 수사와 군법회의 유죄판결과 좌익 사상 전력을 거론했고 일부는 단기간이지만 일본군 복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만주군관, 일본 육사 교육 남로당 전력 시비의 분석

37년 대구사범 졸업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40년 만주군관학교, 42년 일본육사 등 일제치하에서 교사를 지냈고 군사교육을 받은 것도 나중에 대통령이 되니까 시비와 문제가 됐다. 광복 후 488월 소령으로 진급한 박정희는 그해 10월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사령부 작전장교로 발령 받았지만 11월 군내부 남로당 조직원들의 제보로 남로당가입 혐의로 체포돼 수사를 받았다.

청년 박정희의 만주군관 및 일본육사 입학, 소령 박정희의 사상편력 등은 해방전후의 혼란한 시대상황의 극복과 가난한 생계의 보장 등과 직결돼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극소수의 지주계급을 제외한 해방 전 세대의 보통사람들은 환경이 척박하고 가난해서 배우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박 대통령의 가문도 영남유림의 선비집안이었지만 소작농으로 생계를 꾸려갈 정도로 궁핍했다. 끼니를 굶더라도 담 넘어 글 읽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 상모리 생가에서 태어난 박 대통령의 부모님은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보통학교와 대구사범에 막내아들 박정희를 기를 쓰고 학교에 보냈다.

불편함과 제약이 많았던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기만 하면 먹고 사는 생계유지는 해결하는 시대였다. 1910년대 산골에서 출생한 우리의 선대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일가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을 하거나 굶주리면서 숨어서 혼자 외롭게 살아야하는 암울한 시기였다. 단순하게 소작이나 농사만 지으면 그만이나 총독부시절인 그 때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이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를 빼앗긴 어려운 처지에 집안이 넉넉해 일본으로 유학간 조선인들은 경성 제국대학과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일본관리나 변호사로 활동한 사람도 있다. 박 대통령같이 가난한 집안 자식들은 사범학교, 농림학교 등을 졸업해 일제 때부터 평생교사와 지방관리로 지낸 사람들도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해방 후 친일파로 낙인 찍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시골청년 박정희는 해방전후의 세대들이 힘들었던 생계의 유지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고난의 삶을 직접 보고 듣고 성장했다. 박정희는 그래도 신학문에 눈을 뜨고 개화와 개혁을 꿈꾸었던 젊은이였다. 일생을 보통학교 교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고 더 넓은 미래로 향하기 위해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의 초급장교 계급장을 달고 일본군에 어쩔 수 없이 적을 두었다.

시대의 혼돈이 가져온 일본 교육과 좌익 사상편력

이같은 박정희의 이력 가운데 보통학교 교사 특히 일본군 경력은 당시 시대상황의 적응과 가난한 생계의 해결 차원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교사신분과 일본군 복무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개인사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육군장교 박정희가 48년 숙군 수사 때 남로당 가입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은 좌익 전력도 해방전후의 시국 상황과 지식인의 의식 성향과 함수관계가 적지 않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지만 시골의 가난하고 머리 좋은 수재들은 고학을 마다하면서도 중등, 고등 교육시설이 있는 대구, 부산 등의 대도시로 뛰쳐나와 공부에 열중했다.

이때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스승으로부터 감수성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마르크스, 레닌 관련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한 학생들 일부는 좋게는 사회주의, 나쁘게는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재학 중에도 비밀리에 항일독립운동과 이념서클에 가담해 활동했다는 역사의 증언과 기록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박정희가 제일 좋아하고 따랐다는 셋째형 박상희(10.1 대구폭동사건때 피살)가 바로 그런 지식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시절 조선의 지식인에게 한때 유행병처럼 번졌던 사회주의 성향의 오해를 받아 남로당가입 연루 의혹의 수사와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당시 형을 면제 받은 후 육군소령으로 복직해 6.25전쟁에 일선지휘관으로 참전해 북한군과 맞서 목숨 걸고 싸웠다. 사상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군인으로 복권한 것이다. 육군소장으로 5.16 쿠데타를 주도했을 때 반공을 국시의 제1공약으로 삼았으며 5일후 2천여 용공분자를 잡아들였다.

63년 대통령선거 때 윤보선 후보 등으로부터 일본군 행적과 남노당 가입 혐의 등을 들고 나와 사상논쟁을 제기했으나 승리한 박정희 공화당후보는 내가 빨갱이였다면 6.25전쟁 때 사단을 이끌고 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고 역공했다.

서거 35년이 지난 지금도 재야 정치세력 일부는 박 대통령의 일본군 및 좌익 전력에 대해 뜬금없이 시비를 걸고 있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육군 대령이지만 계속 셋집 전전하면서 생활

박정희 대령은 1953년 여름 대구에서 서울 동숭동 방이 둘 딸린 셋집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했다. 당시 박 대령의 월급은 겨우 쌀 한가마니 값도 모자라는 2만환 정도였다. 그해 가을 다시 부관의 소개로 지금의 성북동 보문파출소 뒷편에 있는 방 세칸짜리 일본식 집 독채로 옮겼다.

전세금을 낼 돈이 없어 박 대령은 월세를 내고 살아야 했다. 천성대로 청렴하게 군인생활을 한 까닭에 충북 옥천 양가집에서 부유하게 자랐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입던 옷을 내다 파는 고생도 겪었지만 남편 박 대령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부하였던 부관과 김재춘 대령이 가끔 신경을 써 도와주었다.

195311월 진급이 빠른 포병이었던 박정희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운 좋게도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25명의 장교들과 함께 오클라호마의 포트 실로 6개월 코스의 군사교육을 받았다.

미국은 만주, 일본에 이은 세 번째 유학이었다. 이곳에서 익힌 포술학, 전술학 등의 교육보다는 유학 기간 동안 체험한 미국인의 개성, 미국사회의 특징, 미국군대의 현황 등이 유익하고 또 인상적이었다. 박정희 준장은 미국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인 546월 포트실에서 매우 가정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일기를 썼다.

인천 부두에서 기다릴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웃으면서 나를 맞아줄 나의 어진 아내 영수! 셋방살이, 없는 살림, 우물하나 없는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태평양보다 넓은 유일한 낙원이고 마음의 안식처이다

아내와 가족사랑의 애틋한 정이 넘쳐흐르는 글이다.

546월 박정희 준장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박 준장은 바로 2군단 포병단장으로 발령 났다. 6.25전쟁 직후 육본정보국장으로 있을 때 소령으로 복직시킨 장도영 군단장이 9사단장-참모장의 상하관계 인연에 이어 세 번째로 부하로 데려다 썼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늘 베푸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5.16 쿠데타 초기 참모총장인 그를 앞세웠는지 모른다.

미국에서 돌아온지 사흘만에 둘째 딸 근영이가 태어났고 10월 광주 포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6.25 전쟁후 박정희는 본격적인 군장교와 지휘관을 역임하면서 상관으로부터 작전, 참모능력과 정직한 인간성을 인정받으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요즈음 말로 스펙을 넓게 쌓아나갔다.

군수기지사령관 부임 후 5.16군사혁명 계획

육군본부 작전장교 시절 박정희 장군은 작전자장으로서 작전국장 이용문 장군, 유원식씨(5.16후 화폐개혁 주도)등과 함께 일했다. 이용문 장군은 박정희 장군을 무척 신임했으나 훗날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그의 아들 이건개(검사장, 국회의원)를 최연소 서울시경국장으로 발탁해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9사단 참모장 시절 정일권 참모총장을 직접 안내했으며 포병학교 교장 때는 김계원, 심흥선, 이희권 장군과도 친하게 지냈다. 5사단장 때는 3군단장 송요찬 중장, 채명신 20사단장, 김용배 소장, 강문봉 중장, 송석하 준장, 차규현 중령, 윤필용 중령, 전속부관 한병기 중위(훗날 사위) 등과 기념촬영한 옛 사진도 볼 수 있다.

▲5사단장 시절의 박정희 준장(앞쪽 왼쪽에서 세번째) 그 왼쪽은 3군군단장 송요찬 중장. 맨오른쪽이 정보참모 차규헌 중령.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전속부관 한병기 중위. 박정희의 모범적인 차례자세가 인상적이다(1956.7).
58년 3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박 대통령은 원주 1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했고 그해 서울 신당동에 건평 30평의 단층가옥을 마련했다. 이 집에서 장남 박지만 군이 태어났으며 5.16 거사 때까지 살아온 박 대통령의 사저(私邸)로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59년 서울 6관구 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 때는 국회 국방위의 국정감사도 받았으며 2군부사령관도 역임했다. 1960년 육본참모본부장 시절 이광노(전 경호실 작전차장보, 전 국회의원) 공수단 대대장의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19601월부터 부산 군수기지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박 대통령은 5.16 쿠데타를 구상하고 은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5.16쿠데타 한해 전인 1960년은 3.15 부정선거로 4.19 학생혁명이 발생해 계엄이 선포됐고 박정희 소장은 부산지구 계엄소장에 임명됐다.

4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박정희 소장은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 조사에서 학생들의 애국심과 용기있는 행동을 기렸고 5월에는 3.15 부정선거에 동조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퇴진을 권고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김종필 등 육사8기생들은 정군(整軍)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제출하려다 발각되어 김종필 등 5명은 반란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박 소장은 그해 6월 육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소장 이상의 장성들에 대한 숙정(肅正)을 요구하여 김종필과 함께 군 내부에 적지 않은 파문과 충격을 몰고 왔다.

당시 이승만 체제가 붕괴되고 허정 과도정부가 7295대 국회의원선거를 치루고 내각책임제의 민주당 정권이 세워지면서 당시 시국과 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그해 7월과 9월 박 소장은 광주 1관구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임명 받았으나 12월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이시기를 전후하여 군부자체의 동요와 더불어 군 내부에서 확인할 수 없는 쿠데타설이 나돈 것으로 알려졌다.

운명의 날인 1961516일 쿠데타의 최고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은 해병여단 제2중대를 앞세워 한강 인도교에 진입했다. 헌병들의 총격과 저항이 있었으나 박정희는 지프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카빈을 들고 뒤따르는 이석제(감사원장)중령에게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면서 꼿꼿하게 걸었다. 한참 걷다가 한강 난간을 잡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5.16군사혁명의 성공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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