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 비판 무시하고 정부주도 경제개발 강공
개발독재 비판 무시하고 정부주도 경제개발 강공
  • 김길홍<언론인·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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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남긴 경제교훈(2)
▲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서 여덟번째)과 KIST창립에 공헌한 국내외 인사들(1966.2)

박정희대통령은 최근 사망한 리콴유(光耀전 싱가포르 총리와 같이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 불리면서도 개발독재의 상징적 인물로 전세계에 다시 부각됐다민주와 자유를 우선시하는 서방지도자와 선진국 언론들이 그렇게 평가하지만 박 대통령과 리콴유 총리는 자원도 없고 가난에 허덕이며 외침의 위협을 받는 후진 약소국의 지도자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와 인권 누릴 것 다 누리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정치체제로는 단기간에 발전과 번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함께한 것 같다아시아의 두 지도자는 사후에도 비슷하게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개발독재라는 통치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여 세계 최대빈국이었던 한국과 싱가포르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민주화세력 김대중정권 이후 국가가 다양한 보상

 

박 대통령은 한국에서 민주화는 천연시켰지만 산업화를 앞당긴 개발독재의 국정운영은 그래도 많은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반대로 소수에 불과한 강경 민주진영과 좌파세력은 박 대통령에게 자유와 민주를 말살한 군사독재자라는 비난을 지금도 계속 퍼붓고 있다교과서적 서구 민주주의를 해방 후 당장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다면 과연 오늘의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없었음을 상당수가 인정할 것이다정치적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일부 제한하거나 유보하고 경제개발과 국가발전을 우선시하는 통치방식을 일반적으로 개발독재라고 부른다국어사전은 경제 개발과 성장의 깃발아래 자행되는 강권정치라고 풀이했다.

보수정권이 앞장선 산업화의 우선정책이 박 대통령 시절부터 중단하지 않고 추진되는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이 어렵게 벌여온 반민주 투쟁과 그들의 희생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의 주역과 밑거름이 된 산업화세력은 그동안 제대로 보상받은 적이 없었다오히려 민주화투쟁을 불법적으로 탄압했다고 정치적으로 규탄 받고 소급해서 형사처벌을 받았던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민주화에 참여했던 정치인과 그 추종세력들은 다수가 민주화가 완성된 2000년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법원의 재심을 거쳐 사후 국가보상의 혜택을 받았다.

민주화가 산업화에 밀려 뒤늦게 완성된 덕분에 그동안 그들이 치른 고통과 희생은 어느 정도 보답받았다고 할 수 있다.

 

60년 국민소득 100달러 수출 200수입 2억달러

 

5.16 8개월 전인 60년 10월 발행된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 Foreign Affairs는 한국경제를 이렇게 보도했다. “60년의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이하수출은 200만 달러수입은 2억 달러전력생산량은 멕시코의 6분의1,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라는 이런 처지에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계획의 가장 실망스러운 현상은 원조계획이 한국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결국 한국인이 선택에 직면하는 것은 워싱턴이냐모스크바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하는 것이다

기아선상의 민생고북의 남침 위협 등 이같은 비참한 민생과 안보의 위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5.16을 거사했다적화통일의 안보위기는 국방의 최일선에 섰던 전문가 그룹인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국민을 다소 안심시켰다반면에 경제의 문외한인 박 전 대통령과 쿠데타 군부실세들이 최악의 경제빈곤과 장기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국정운영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갖고 있는지 당시 민간출신 경제관료과 지식인들은 의문을 표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민족의 가난을 퇴출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소신과 구상을 쿠데타 오래전부터 해 온 것으로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밝혔다전문 경제관료들과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들었겠지만 박 대통령은 최빈국인 한국의 경제 개발을 앞당기려면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야한다는 확신을 가졌다경제학자와 경제교과서는 경제는 시장 자율로 성장하게 유도하고 가급적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경제운용의 원칙이라고 주장했고 세계은행 같은 국제경제기구도 그런 식으로 자문했다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면 시장을 왜곡시키고 자원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박 대통령은 경제학자들의 생각과는 크게 달리했다한국의 경제개발 성공을 확인한 여러 국제경제 기구들은 최근 강력한 정부주도의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오히려 효율적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결국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한 셈이다.

 

▲독일 함보른탄광을 방문해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한 박정희 대통령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파독간호사들 (1964.12.10)

 

정부주도형 경제개발 정책 시종일관 소신대로 추진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16 혁명공약 제4항이다.

박 대통령은 5.16 9일만에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라면서 5천년 가난을 추방하는 첫 개혁조치로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발표하고 농어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대책을 국민 앞에 선보였다그해 재건국민운동 본부(본부장 유진오 고려대총장)를 발족시키고 여름과 가을 농촌출신 답게 모내기와 벼베기 행사에 직접 참여해 혁명내각의 농촌 재건운동에 드라이브를 걸었다이 국민운동은 훗날 자립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으로 다시 태어났다.

경제개발 최우선의 산업화에 출발이 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2~66)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62년 1월 야심찬 발표가 이루어졌다혁명정부 때부터 서둘러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세운 것이다경제성장률 연 7.1%, 정유철강화학공업 등 기초 공업과 비료시멘트화학섬유 등의 공장을 건설할 220개의 사업계획을 세우고 미국일본서독 등으로부터 외자도입을 추진했지만 역시 사정은 녹녹치 않았다. 62년 2월 제철비료석유화학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지금의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지만 소요 외자도입을 놓고 한미간에 격론이 벌어졌다미국의 원조기관인 유솜의 킬렌 처장은 생필품도 없어 미국에서 갖다 쓰고 돈이 없어 원조 받는 처지에 무슨 공업단지냐고 반대했으나 미국일본 기업의 도움으로 공사가 시작됐다이때 아이디어를 낸 경제인은 남궁련이병철 씨 등이었으며정부쪽에서는 김정렴 상공차관안경모 부흥부차관이 공단 건설 실무를 뒷받침했다.

군사정부의 의욕적 경제개발 정책은 61년 여름 화폐개혁의 실패로 주춤했다. 62년 경제성장률은 목표치 5,7%에 못미치는 2,8%에 불과했고 흉작으로 인한 곡가파동, 63년 외환고갈 등으로 초기에는 난관을 겪었다하지만 61년 충주비료공장, 62년 새나라 자동차 공장, 64년 울산정유공장단양 시멘트공장을 연이어 준공하는 산업화의 개발실적을 과시했다.

박 대통령은 63년 1월 제3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국회본회의에 처음 참석하여 읽은 연두교서에서정치인은 모든 동포가 다 먹고 살 수 있는 방도를 시급히 강구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최우선 국정철학을 제시한 것이다수출입국을 주도해온 박 대통령은 수출 1억달러의 목표 달성을 기념해 64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67년 3억 달러 수출 계획을 수립하는가하면 65년부터 청와대에서 매월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64년 경제개발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하여 파독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박 대통령은 이때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인상 깊게 시찰하면서 한국에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그 후 68년 1월 착공하여 그해 12월 경부고속도로 서울-오산간을 불과 10여개월만 완공했다. 65년 식량자급 계획 수립대일 청구권자금 투입하는 포항제철 건설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의 대량원조와 외화수입섬진강댐영월화력발전 준공, 66년 과학기술연구소(KIST)기공 등 제1차 경제개발계획 5년 동안 농업과 공업의 발전과학기술의 진흥은 물론 수출증대를 위한 기초작업과 성장기반을 조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서울-대전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1969.12.10)

 

실용주의 전문경제학자 엘리트 경제관료 총동원

 

경제 제지상주의를 고집한 박 대통령의 산업화시책 핵심과제들을 군사작전처럼 계획과 과정 전반에 걸쳐 성과와 내용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분석했다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박 대통령은 5.16후 미국의 선진 군사행정 기법을 후진적인 정부와 공무원 조직에 처음 도입하여 우리나라 행정의 수준을 근대식으로 한단계 끌어올리는 역량도 발휘했다2차 경제개발계획(67~71)의 성공은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농업기반에서 경공업 산업구조로 성장하게 만들었다3차 경제개발계획(72~77)은 노동집약산업에서 기술집약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중화학 공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80년대 자본 집약적 고도산업사회에 대비한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첨단기술의 개발에 집중했다그 결과 원자력 발전철강기계자동차조선전자석유화학 분야의 산업을 세계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함정대포,탱크고등 훈련기 등을 생산해 수출까지 하면서 자주국방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박 대통령의 탁월한 경제개발구상과 실천은 전문가그룹 학자들과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연구와 보좌를 받아 이루어졌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자로 참여하고 최형섭 박사가 초대소장으로 임명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산업화 관련 선진 과학기술을 연구 개발했다.

71년 설립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전문학자들이 국가 경제발전의 과제 연구와 경제정책의 수행 등을 담당하여 개발도상의 구체적 경제시책 내용을 뒷받침하고 보완했다엘리트 경제관료들에게는 무한신뢰를 보여주어 발전속도를 가속화했다경제개발 정책의 내용을 연구하는 연구기관과 연구요원들에게는 자긍심을 갖게하여 노고를 각별하게 치하했다사람을 잘 부리고 일을 시키는 자상하고 치밀한 리더십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최형섭 원장백영훈 박사 60년대 경제참모 역할

 

조국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지도자의 통찰력과 탁월한 안목우수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는 용인술이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의 꿈을 현실로 바꾸었다경제발전으로 요약되는 산업화의 성과와 교훈도 박 대통령시대를 되돌아보면 역시 그의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박 대통령을 보좌하고 경제정책을 행정일선에서 책임지고 수행했던 경제장관과 대통령 비서관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다 소개할 수 없다.

5.16 후 혁명정부 내각과 63년 제3공 출범 전후의 경제기획원 장관은 일제때 외국에서 공부를 했거나 자유당정권 때 경제부처에 근무했던 김유택김현철송인상유창순 씨 등이 맡아 최빈국의 수준에서 벗어나는 자립의 기초를 닦는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64년 서독방문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박사(산업개발연구소장)가 60년 서독 유학시 은사를 찾아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노임을 담보로 3천만달러 외자도입을 성공시켰다백 교수는 당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입안을 주도한 박 대통령의 최초의 민간 경제참모였다.

60년대 중반부터 장기영박충훈김학렬태완선 씨 등이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박차를 가했고 남덕우신현확 씨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후부터는 박 대통령은 제3차 경제개발 계획(72~77)과 80년대 고도산업사회를 대비한 중화학공업과 첨단과학 기술개발에 집중하던 시기였다그 시기에 재무상공부흥건설농림교통부과기처 장관에 전예용황종률홍승희서봉균김정렴김학렬김용환장예준최각규김원기주원안경모고재일이낙선황인성장덕진정소영차균희박동묘김윤기최형섭 씨 등 기라성같은 경제관료 엘리트와 추진력이 강한 군출신이 전면에 나서 경제개발에 가속도를 내는 주역을 담당하게 했다.

70년대 대통령 비서실의 핵심경제 참모로는 재무상공장관을 역임한 김정렴 비서실장훗날 재무장관으로 기용됐던 김용환 씨농림장관으로 영전했던 정소영이희일 씨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을 기획했던 오원철 씨가 경제수석을 맡아 박 대통령의 경제 측근참모로서 활동하면서 전폭적 신임을 받았다공군 소령 출신인 오원철씨 는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내다가 5.16후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차관보 때 청와대 경제 제2수석에 임명됐다그는 박 대통령의 지휘를 받아 산업공단건설철강조선방위산업행정수도 이전중동진출원자력 등 주로 중화학분야를 실무적으로 기획하고 총괄하는 참모였다박 대통령은 그를 가르켜 오원철이는 국보야국보라고 극찬할 만큼 무한 신뢰를 표시했다.

 

완벽한 민주·자유의 향유 산업화 없이는 불가능

 

이처럼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리더십에 발맞추어 신뢰받는 경제참모가 경제시책의 추진목표와 진행경과를 확인하고 점검한 까닭에 속도와 성과가 빠르고 알찬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분석된다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도입을 주관했고 경제발전의 주역을 맡았던 내각의 장기영김학렬남덕우 씨는 타계했지만 김정렴정소영김용환오원철이희일백영훈 씨는 역사의 산증인으로 아직 생존해 있다.

9년 3개월 대통령비서실장을 재임했던 김정렴 씨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 주도로 경제시책을 시행한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 바탕이었다라고 회고했다그는 또 저축증대를 통해 국내자본을 확충하고정부사업이나 민간사업의 투자를 위해 요즘과 달리 정부가 나서서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국내외 자본조달_경제건설의 우선순위 결정_계획의 시행과 점검 등이 모두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대통령 경제특보를 역임했던 남덕우 씨는 생전에 허구와 관념을 배척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삶과 국정을 개선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조상전래의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이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고 학자출신답게 분석했다그는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가 없으면 혼란과 무질서가 지속되고 따라서 경제개발이 불가능한 것으로 믿었다고 소개하고 그분은 온전한 민주주의를 실시하려면 민주주의 기초가 되는 경제발전을 먼저 성취해야한다는 것을 스스로 역사적 소임과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바꾸어 말하면 오늘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전제가 되는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박 대통령의 선산업화 덕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 산업화의 영웅인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을 볼 수가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건국 대통령이자 보수의 원조인 이승만 대통령도 역시 서울에 동상이 없다우리는 세계역사에서 이념의 지도자와 실천의 지도자가 동시에 존경받는다고 배웠다민주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잘못과 허물은 전적으로 지도자들만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그가 재임했던 시대의 국제관계,국민의 의식수준정치사회의 환경사회의 관습과 현상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국정운영에 큰 영향을 미친다민주화를 지연시킨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산업화를 먼저 이룩해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하게 하고국민이 먹고 사는 민생문제를 해결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국가적 발전과 도약의 번영을 앞당긴 박 대통령시대의 경제교훈을 오늘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다시 연구하고 계승해야 할 필요가 있다그렇게 함으로서 오래전부터 과거의 지도자들을 폄하해온 편협한 역사의식을 고쳐 소중한 우리역사를 다시 이해하고 용서해야만 다음세대가 국가발전을 영속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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