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박정희 대통령
언론을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박정희 대통령
  • 김길홍(언론인, 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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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의 추억과 비화 연재(6)

남북 불가침협정을 제의하는 박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모습(1977. 1. 12. 청와대 영빈관)

출입기자를 늘 가족처럼 대하고 배려해

절대권력의 정상을 18년 유지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한가족 같이 사랑을베풀고 인간적으로 대우했다. 권위와 위엄에 걸맞지 않게 다양한 취재 편의를 제공할 것을 참모들에게 지시하고 대통령부터 스스로 출입기자들을 인격적으로 예우하고 한결같은 친절을 베풀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당시 중앙과 지방의 신문방송사에 한명씩 파견하여 모두 21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부산, 경남, 대구, 광주의 지방지 5명이 포함됐고 방송 3사 카메라맨과 문공부 카메라맨도 출입했다.

출입기자단은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행사의 성격과 공간 등을 감안하여 기자단 전원이참석하거나 2명의 풀 기자(대표취재 보도)를 일정한 순서를 정해 대통령을 수행 취재했다.

대외비나 보안이 필요한 대통령의 행사나 동정은 대변인(공보수석비서관 겸임)이 지시사항과행사내용을 발표하면 출입기자들이 기사화하여 보도했다.

박 대통령이 참석하거나 주재하는 공식회의와 공식행사에는 대부분 출입기자들이 일상적으로 전원 수행하여 취재하는 것이 보통이다.박 대통령에 대한 취재와 보도가 통상의 관례처럼 이루어졌기 때문에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박대통령을 근접해서 말씀을 직접 듣고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보다도 많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는 중앙 일간지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정치부소속 차장과 부장대우 등 시니어급(중견간부)기자들을 엄선하여 청와대에 출입을 신청했다. 대통령 경호실의 신원조회를 마친 특정기자를 공보수석실이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청와대 비표가 나오면 출입과 취재가 대부분 허용된다. 때로는 연좌제 적용을 받아 출입허가가 비토(Veto)된 경우도 간혹 발생했다.

청와대 기자는 각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2년정도 출입하면 편집국 부국장 또는 정치부장 등으로 승진하면서 교체된다. 출입기자로 활동하는 기간 중 박 대통령과 특별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기자들도 많았다.

박 대통령이 국사에 바쁘지만 일년에 보통 분기마다 갖는 공식비공식 오찬이나 만찬 간담회에서 소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서로 특별한 인상과 개인적 교분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았다.

박 대통령과 교감하고 인연을 가진 출입기자들이 언론계 간부로 성장하면서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국정운영을 전파하는 홍보와 역할에 일정부분 기여한 사람도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의도한지는 알 수 없지만 언론인을 다루는 인격과 품성이 천성적으로 꾸밈없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배려가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분석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육군소장 출신이지만 신문 방송 등 언론의 영향력을 활용할 줄 아는 안목과 식견과 경험을 겸비한 정치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진해 부근 저도에서 여름 휴가 중인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함께 기념촬영 했다.(앞줄 왼쪽부터 네번째가 필자, 다음이 박정희 대통령)

차분하고 신중한 퍼스트레이디 대행 박근혜

1974815일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타계한 후 당시 큰 영애로 호칭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유학중 귀국하여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박 대통령과 함께 공식비공식 행사에 참석하면서부터 출입기자들과 자주 만나고 대화도 나누게 됐다.

박 대통령이베푼 오찬과 만찬에도 자리를 같이하면서 기사를 다루는 취재원으로서 접촉하는 기회가 차츰 늘어났다. 큰영애가 혼자 참석하거나 주재하는 공식비공식행사에 기자단과 풀 기자가 수행하여 별건기사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통령 큰따님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가까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76년경부터 큰따님과 기자단이 함께 청와대 경내 코트에서 시작한 테니스였다.

아버지 박 대통령이 베푼 오찬에서 기자단이 퍼스트레이를 대행하는 큰따님의 건강 유지를 위해 기자단과 테니스를 같이 치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아들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출입기자단은 대통령 큰따님과 테니스를 치면서 개인적 친분도 쌓고 또한 가장 중요한 취재원인 박 대통령의 생각과 근황을 큰따님을 통해 직간접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청와대 코트에서 진행되는 큰따님과의 테니스는 출입기자로서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하는 비공식 주요 행사였다.

특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한 70년대 후반부터는 필자가출입기자단 대표간사를 맡아 공보비서실과 같이 테니스 경기의조를 짜고 제반 준비를 거들었다. 기자단은 테니스를 마치거나 휴식시간과 만찬 시간에 다과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때로는 무거운 청와대 바깥의 세상여론과 민심을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큰따님에게 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큰따님 때부터 몸가짐과 대화가 퍼스트레이디답게 흐트러진 모습을한번도 보이지 않고 차분하며 신중했다.

아버지처럼 말을 하기 보다는 주로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출입기자들이 가끔 거친 말투와 점잖치 못한 표현을 쓰더라도 출입기자들의 잡다한 질문과 여러 얘기들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금방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대화가운데 아버지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도움이 되거나 필요한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사실을 나중에 기자들이 확인하고 놀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출입기자단과의 오,만찬 석상에서 큰따님에게 기자들이 말한 내용들에 대해대통령의 견해와 생각을 간혹 밝힐 때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 박대통령과 출입기자단을 연결하고 시중 여론과 일반 민심을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이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로부터 대통령의 기본 자질과 리더십 덕목을젊을 때부터 전수받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로부터 평가받아 국정수행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동료기자들과 함께 매주 2번 박근혜양과의 테니스 모임을 가졌다.(박근혜 대통령 바로 뒤가 필자)

언론계 출신 정관계요직 많이 등용

국가를 운영하고 정부시책을 집행하려면 언론인의 협조와 언론매체의 활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박 대통령은 재임시 언론사 사주들을 수시로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5.16혁명 후 최고회의 당시 출입하거나 취재했던 류혁인(동아일보), 김성진(동양통신), 김종신(부산일보), 선우련(조선일보)씨등 정치부출신 언론인을 정무수석, 공보수석 등의 최측근참모로기용했으며, 정재호(경향신문),이종식(조선일보), 이진희(서울신문), 임삼(한국일보)씨 등 언론계 인사를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임명했다.

박 대통령 시절 국민의 기본인권에 해당하는 언론자유가 침해받고 제한되고 억압받은 것은 틀림없다. 언론자유를 지키려는 언론의 저항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고 시국에 관한 비판기사를 썼던 언론인들이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가 곤욕을 치루는 일도 빈번했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해직되면서 당시 정부의 언론탄압이 표면화되어 동아, 조선의 해직기자를 중심으로 신문사와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 벌어졌다. 때로는 정부와 언론의 긴장관계가 조성됐지만 당국은 언론사와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설득노력도 꾸준하게 전개했다.

박 대통령 시대에는 언론에 대해 강온 양면작전을 구사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언론자유에 대한 간섭과 탄압을 언론인들이 제일 싫어하고 반발하는 행동은 당연한 것 이었다.

박 대통령이 집권한 후부터 시작된 야당과 재야의 민주화투쟁목표가운데 언론자유의 보장도 포함됐다.

언론 사장·편집국간부청와대 초청 자주 대화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언론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나 제일자주 만나는 언론인인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는 특별하게 언급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이 처한 특수한 안보와 경제현실을 감안한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론직필(直筆)이라는 휘호(揮毫)를 신문 창간기념일에 직접 붓글씨로 써 보낼 만큼 언론 본연의 사명은 인식하고 있었다.북한의 도발위협 등 남북분단의 현실과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기자들에게 설명하면서 국익 우선을 위주로 한 신문 방송의 신중한 보도와 편집을 부탁했다.

어떻게 보면 박 대통령이 주문하는 국익 우선의 언론보도는 구체적이지 않고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서 받아들이는 언론쪽에서는 해석하기가 곤란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사실을 보도해야하는 언론의 의무와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국회 본회의에서 행한 야당의원들의 반정부 발언과 주장이나 민감한 시국현안 등을 사실보도 할때 고민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언론이 국익을 우선해서 보도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하다.

박 대통령이 19733월 월례경제동향보고 회의에 참석하여전국 5개 도시 대단위공업단지건설을 추진하는 계획을 보고 받았다.박 대통령은 이 공단건설에 관해 몇 가지 지시를 하면서 수행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5개 공단건설계획이 사전에 보도되면 땅값이 폭등하여 공단건설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식발표 때까지 신문방송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특별히 당부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필자는 신문사에 들어와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에게 박 대통령의 당부를 전달했다. 다음 날 필자가 소속된 신문에 5개공단 건설 계획 기사가 1면 톱으로 게재됐다.

저녁에 해당기사를 내보낸 경제부장, 경제부기자, 필자가 거의 동시에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갔다. 밤늦게 풀려났지만 경제부장과 기자는 곤욕을 치렀다. 당시 국익에 반하는 일반기사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었으나 국가안보 관련 기사는 다르게 취급했다.

727.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전후하여 이후 락중앙정보부장의 평양방문과 북한 박성철의 남한방문 사실을 일부 기자들이 낌새를 알아차렸다. 극비의 보안사항이 누설되자 중앙정보부가 정보를 입수한 중앙일간지 기자들을 붙잡아가 기자들이 곤욕을 당한적도 있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사건들이 당시에는 벌어졌다. 박대통령 시대에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고 제한 당하고, 정치민주화가 방해받은 것은 엄연한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된다.

반대편에 선 정치권과 지식인들이 피해와 고통을 받은 반면그동안 꾸준하게 유지해온 국력신장과 국론통일에 힘입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빨리 진입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국가운영과 국정수행에 언론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평소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등을 수시로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과 만찬을 함께하면서 주요 국정현안을 설명하고 언론의 이해와 협조를 요청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철학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직접 구상하여 추진하는 중요정책이성과를 거두려면 우선 각 언론사의 청와대 출입기자단의 선도역할을 특별하게 주문했다. 대통령 참석 행사와 각종 정책회의를 취재보도하는 수행기자가 바로 청와대출입기자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모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박 대통령의 생각과 행동 전반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언론사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파견할 때는 인성과 실력을 감안, 다음에는 중요부서의 부장 바톤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인물을 신중하게 선발했다.

박 대통령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입기자들과 자주 간담회를 가졌다.(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필자)

언론탄압 반대했지만 인간성 좋아해

박 대통령은 가장 근접해서 취재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인간적으로 많이 배려하면서 각종행사, 간담회, 휴양지등에서 솔직하고 소탈한 성품대로 스스럼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국정전반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국정철학을 이해하는 출입기자들이 승진하여 언론사 간부로 전출하면 정부와 박 대통령을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았다.

자주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출입기자 개개인의 인성과 능력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인간적 배려와관심도 자상하게 베풀었다. 사실 10·26사태 2년여를 전후하여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 가운데 그 후 중앙일간지의 사장(4)과 부사장, 주필(2), 방송사 사장(1)등이 나왔으며, 고위공무원(2) 국회의원(5)으로도 진출했다.

대부분 정치부장으로 승진하지만 직간접적으로 박 대통령의신임을 받는 류혁인, 김성진씨등 언론출신 대통령 참모들도 간접적으로 출입기자들의 영진(榮進)을 지원한 경우도 간혹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를 출입하고 취재한 언론인들은 국가원수로서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간성 등을 직접곁에서 지켜보고 겪어봐서 그렇겠지만 거의 모두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했다.

당시 전체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의 민주화를 지연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통치방법에 대해거부반응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다년간 청와대출입 경력을 가진 언론인들의 견해와 인식은 일반 언론인들과는 좀 차이가 난다.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조기에달성하고 국력을 조직화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집념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존경해왔다. 때문에 그의 보이지 않는 후원세력이 되는 사람이 많았다.

8년간 출입한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정치지도자로 인식하면서 역사를 보는 안목과 평가가 달라졌다. 그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향하는 보수적 국가관을 가지게 됐다.

박 대통령 서거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언론인이 중심이 되어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결성하여 운영해왔다.

그들은 또 신문, 방송, 잡지, 저서 등을 통해 직접 취재하고 보도한 기억과 사실을 되살려 대통령 박정희, 인간 박정희의 위업과 면모를 후세에 기리고 회상하는 저서를 다수 발간했다. 요즈음도 언론과 관련 인터뷰와 특집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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