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인사스타일 "대통령 비서는 눈귀있어도 입은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인사스타일 "대통령 비서는 눈귀있어도 입은 없다"
  • 김길홍(언론인ㆍ한국미디어서비스 회장)
  • 승인 2014.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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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 처신 신중하고 입 무거워 ...철저한 공사구분 인사

- 류혁인 정무 : 安東선비답게 강직하고 조용한 보필
- 김성진 공보 : 필요한 말만 하는 포커페이스 대변인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선언 및 계엄령 선포(10월 유신)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 첫번째 아래가 필자(1972.10.17)

대통령 비서는 눈귀는 있어도 입은 없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청와대 참모와 보좌진은 요즈음에 비하면 규모나 숫자로 보더라도 단촐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비롯하여 의전, 공보, 정무12, 경제, 사정, 민정수석과 1~2명의 특보단으로 대통령비서실을 운영했다.

박 전대통령은 군 지휘관 출신답게 지휘조직과 참모조직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국정전반을 운영했다. 대통령비서실은 특명사항의 처리와 참모 연구를 맡기고 내각의 장관에게는 일선 행정의 지휘와 집행을 위임했다. 소관업무의 전반을 잘 파악하고 소신대로 시책을 추진할 수 있는 여유와 신임을 부여했다. 장관과 수석들이 대통령의 이런 인사 스타일로 인해 장수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많은 편이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빼면 개각이 잦지 않아 김정렴 비서실장은 9년 동안 재임하는 기록을 세웠다.

박 전대통령의 참모들은 처신이 한결 같이 신중했고 모두가 입이 무거웠다. 대통령 지시사항 등 대외 발표는 대변인(공보수석)으로 창구가 엄격하게 일원화되어 있었다. 기타 수석들은 정책의 이해를 돕고 혼선을 막기 위해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가끔 출입기자단에 해주는 정도다. 정부정책의 결정과 발표는 관계 장관이 전담하도록 했다. 일선행정을 추진하는 장관의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배려하는 대통령의 통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를 얻고 기사를 발굴하려고 이방 저방 기웃거리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속성과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언론인 출신의 류혁인 정무수석에게 대통령비서관들이 모두 입이 무겁냐고 물었다.

대통령비서는 눈과 귀는 언제나 활짝 열어 놓고 듣고 보고 있어야 되나 말하는 입은 잠그고 다녀야 한다절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박 전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실세라 할 수 있는 측근 수석비서관의 이 같은 몸가짐을 보면서 대통령 박정희의 용인술을 짐작하게 하는 코멘트이다.

필자가 청와대를 출입할 1970년대 중반 공보수석(대변인)과 정무수석을 지냈던 김성진(金聖鎭,1931- 2009), 류혁인(柳赫仁,1934-1999)씨 두 분 모두 고인이 됐지만 그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숨겨진 주변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성진, 류혁인씨 두 분 모두 필자에게는 언론계 대선배였다.

김성진씨는 동양통신 주미특파원 류혁인 씨는 동아일보 최고회의 출입 기자를 거쳐 주일특파원정치부장을 지냈다. 당시 김성진 씨는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청와대 대변인 겸임)이었고 류혁인씨는 정무비서관을 거친 정무수석비서관이었다.

류정무수석, 김공보수석 반듯한 처신 돋보여

▲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
박 전대통령은 대통령비서관들이 청와대 출입기자나 언론인을 접촉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다. 대언론 접촉은 참모들의 판단에 맡겼지만 비서관들은 한결 같이 공사를 구분하면서 반듯하게 처신했다. 출입기자들의 오보나 실수로 큰 소동을 벌이거나 대형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자도 자제했고 대통령 참모들도 신중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출입기자들은 수석비서관 방을 방문하거나 청와대 경내 비서실, 경호실, 대통령이 집무하는 본관을 사전약속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다. 일반 행정부처나 국회, 정당의 출입기자실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청와대 출입처는 정치부 시니어 기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당시 언론계 관행이었다.

청와대 기자실은 발표나 회견이 없으면 정중동의 조용한 분위기였다. 겉으로는 활력과 경쟁이 없어 보였지만 속으로 치열한 취재 전쟁을 보이지 않게 벌여왔다. 국가권력과 국정운영은 물론 정치의 큰 틀이 박대통령과 청와대에 집중된 까닭에 최고 권력의 정보와 흐름을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고 빨리 감지하려했다.

출입기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뿔뿔이 흩어져 청와대 비서실(지금의 비서동)의 이방 저 방을 조심스레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기자실에 앉아만 있으면 발표만 받아 쓸 수밖에 없다.

필자는 경북 인맥(김시진, 류혁인, 정소영)의 인연을 활용하여 많은 수석 비서관들 방을 부지런하게 자주 찾았다. 기사화는 금방 하지 못하더라도 배경을 감지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실력은 다른 기자들 보다 우수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배경설명, 홍보논리, 리더십 홍보 논리정연

박 대통령시절 이 같은 청와대 비서실의 취재여건 때문에 기자들이 자주 찾는 방은 당연히 공식창구인 1층 김성진 대변인실이 으뜸이었다. 그 다음이 정무를 총괄하던 2층 류혁인 정무수석실이었다. 청와대의 공식발표는 김성진 대변인으로 대언론 창구가 일원화돼 있었다. 발표의 중요내용은 업무의 성격이나 두 사람의 친분과 업무상 관련으로 볼 때 류혁인 정무수석이 사전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기자들의 분석과 판단이었다.

때문에 언론계 선후배 사이인지라 자연스럽게 기자들이 매일 두 수석비서관 방에 몰려들었다.

갈 때 마다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시간이 나거나 필요에 의해 개별 또는 집단면담이 이루어졌다. 경제, 사회, 안보, 중화학 정책 등은 관심 있는 분야별로 배경설명을 듣거나 새로운 정책의 흐름을 파악했다. 시간이 나면 양해를 얻어 담당 수석 비서관을 찾아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듣고 보충 취재를 했다. 박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 발표를 전후하여 역할을 분담한 배경설명이나 대국민 홍보논리는 일관되게 정연하고 돋보였다.

, 류 수석은 두 분 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정치, 홍보분야 참모로 국정 현안과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어 기자들에게는 주요 취재원이었다. 성품 또한 부드럽고 기자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서로 부담감을 덜어주는 사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필자가 청와대로 취재 부서를 옮긴 첫해인 1972년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격랑을 불러 온 10월 유신이 단행되고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해였다. 30살의 젊은 기자가 천지개벽과도 같은 중요발표를 떨리고 흥분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직접 목격하고 취재 보도했던 감정과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추풍낙엽 보고 10월유신 암시해도 몰라

19721017일 오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10월 유신을 발표했다. 언론에 아무런 사전예고가 없었던 데다 기자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10월 유신이었다.

72년을 전후한 시기는 김대중 후보와 대결했던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힘겹게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과 재야의 반대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였다. 당시의 정치적 격랑은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박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출입기자들도 정치적 상황의 심각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헌정질서를 중단시키는 초헌법적 10월 유신을 선포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는 초가을이라 청와대 경내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침 일찍 출입기자실에 나온 몇몇 기자들은 밤새 청와대 경내에 주차된 수석비서관 승용차 위에 낙엽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중요한 일이 발생해 수석들이 야근을 한 것으로 추측만 했을 뿐 예사로 지나쳤다.

그즈음 평소 중후한 성격의 김성진 대변인이 언론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청와대 경내 바깥을 가리키면서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잎새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겠구나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10월유신을 암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0월 유신 후의 국회 해산과 긴급조치로 인해 반정부, 반체제 투쟁에 나섰던 다수의 정치인과 운동권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는 사건들을 지는 낙엽에 빗대 예견한 것인데도 기자들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10월 유신은 대통령선거 관련개헌, 언론자유 등 국민 기본권제한,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해산이 핵심이었다. 출입기자들은 류혁인, 김성진 두 핵심 참모가 10월 유신에 깊숙하게 관여했다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냄새를 맡지 못했다. 기자로서 취재능력은 무능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기분은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유신발표 이후 쏟아지는 정부발표의 홍수 속에서 독자가 궁금해 하는 배경이나 흥미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시간에 쫓기거나 보도의 통제와 제약 탓에 제대로 지면에 반영할 수 없었던 것은 지금도 유감으로 생각한다.

기자들이 권력 심층부의 정보에 비교적 정통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취재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반대로 거의 매일 접촉하는 김성진 대변인과 류혁인 정무수석은 보안유지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영남 선비 같은 강직하고 조용한 성품의 류혁인 수석과는 동향(경북 안동)출신이자 외가로 따져 형님 되는 인척사이였다.

또 류 수석은 돌아가신 선친의 안동 고교 제자이기도 하다. 당시 민정수석으로 있던 김시진 수석비서관은 집안 아저씨였다. 30대 초반의 패기만만했던 필자도 정보의 접근과 획득이 유리했으며 취재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0월 유신 발표만큼은 어쩔 수 없는 무능한 기자였다.

10월 유신 발표이후 언론에서 유신에 대한 반대의견 보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비상계엄으로 보도통제가 실시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국력의 조직화와 국정의 능률적 추진, 평화적 남북통일을 위해 유신은 불가피했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유신을 옹호하고 찬성하는 쪽으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18년 동안의 언론인 생활을 접고 그 후 대통령비서관, 국회의원 등 보수정권에 참여했다. 기자시절엔 10월 유신에 가끔 회의적 생각은 가졌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놓았다는 결과를 놓고 볼 때 솔직하게 10월 유신의 성과와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유신 기간 중에는 부자유스럽고 불편한 언론과 인권의 규제와 통제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런 고통과 아픔이 한국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양약이 된 측면도 없지 않다.

이후락씨 평양 다녀온 7.4 남북 공동성명에 경악

197274일 오전 남산 중앙정보부 대회의실에서 이후락 정보부장의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루 전 청와대 출입기자실에 예고됐다. 통보를 받고 기자들이 이리저리 수소문한 결과 남북관계 발표라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 구체적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취재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제한돼 있었다. 간첩사건 발표는 사회부가 담당하기도 했었다.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박성철 북한부수상이 서울을 각각 교차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다는 사실에 기자들과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적화통일을 공언하면서 68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을 감행한 북한이 남북대화를 받아들였다. 한편 자주국방에 전념하던 박 대통령이 김일성과 무력충돌방지 상호협약을 체결한 사건은 뉴스 중의 뉴스였다.

10월 유신과 달리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의 중요인사가 두어 달 전부터 서울과 평양을 서로 오고 가며 협상과 대화가 이루어졌고 미국에도 사전에 통보된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보안이 엉뚱한 곳에서 누설된 것도 사실이다.

눈치 빠른 몇몇 정치부 기자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남북의 중요인사에 대한 동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힌 중앙일간지의 S기자, L기자가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호된 조사를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만약 이후락 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과 평양에서 박 대통령과 김일성을 만났다는 특급 비밀이 언론에서 미리 보도되고 사전에 누설됐다면 7.4 남북공동 성명은 무산 될지도 모르는 위기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당시 정부는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언론은 국가안보 문제나 국익을 해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보도를 자제하고 정부의 요청에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국가대사가 비밀리에 추진되고 또 발표 후에도 대언론 협조와 홍보대책 및 정부 측 배경설명은 김성진, 류혁인 두 사람 위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했다.

1972년 여름과 가을 각각 발표된 10월 유신과 7.4 남북공동성명은 순수 민간인 출신의 김성진씨와 류혁인씨가 박정희 정권의 핵심참모 역할을 수행하면서 생산한 정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성진, 류혁인 씨 두 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유지와 남북관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는 박성철 부수상(왼쪽), 박 부수상의 서울 잠행은 이후락 정보부장의 방북에 대한 답례의 의미이다.(1971.12.1).

경쟁관계이지만 서로 신뢰가 두터운 명참모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두 분의 처신은 항상 신중했다. 대통령의 신임과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잘난 척 하지 않았다. 권한을 100퍼센트 행사하지 않고 조금은 부족한것 같이 자리에 머물면서 항상 겸손하게 처신했다.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인 10월 유신과 남북대화에 대한 그들의 몸가짐도 흠잡을 수 없었고 대언론 보안유지도 용의주도했다. 그만큼 자기 업무에 충실하고 철저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무한하게 충성하는 모습과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공직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스타일도 특별했지만 말실수를 하거나 정무수석과 공보수석 간에 의견충돌로 티격태격하는 광경을 본 기억이 없다. 공사석에서 서로를 헐뜯는 일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다.

김성진, 류혁인씨는 같은 언론계 출신이자 두 사람 모두 정치, 홍보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 출신이다. 수석회의나 대책회의에서 원활한 의견 조율과 충분한 토론을 사전에 거친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했으며 둘 사이의 우정도 돈독했다. 그 탓에 라이벌이 될 수 있었음에도 언론계와 내각 안팎에 원만하고 돈독한 두 사람의 관계가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국가운영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권력의 중심은 국가의 안위와 민생에 맞추어지는 것이고 이를 위해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룰 수도 없고 남의 일을 간섭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국정운영의 요체이자 핵심인 것이다. 권력을 관리하는 테크닉은 어렵고 힘들지만 반드시 완벽해야한다.

요즈음의 권력 주변, 특히 청와대 사정을 살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책임을 상하없이 서로 전가하면서 티격태격하고 불협화음이 노출된다. 청와대 대변인이 공무 중에 사고치는 최근의 모습은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권력의 핵심들이 잡음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고 권력자의 리더십과 탁월한 용인술이 숨어 있다. 거기에 가난한 선비의 처지와 이름 없는 벼슬도 마다하지 않는 포의한사(布衣寒士)의 사심 없는 참모기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했던 그 기라성 같은 참모들의 인성과 실력이 출중했던 까닭에 3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류혁인, 김성진 씨 같은 인물들의 능력과 인품이 변함없이 기억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론인 출신들이 관계나 정계에 진출해 역대 정권의 체제유지와 국가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돌아보는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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