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덩샤오핑 후광 업고 부패척결 가속화
시진핑, 덩샤오핑 후광 업고 부패척결 가속화
  • 손부호 기자
  • 승인 2014.0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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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절대권력 가졌던 전임지도자’ 이미지 필요...덩샤오핑 이후 가장 강한 권력 거머쥔 지도자 구축
▲ 덩샤오핑

중국에서 덩샤오핑(鄧小平) 추모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덩샤오핑 띄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에 맞춰 시 주석과 덩샤오핑의 리더십을 동일시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해외판은 최근 덩샤오핑 관련 논평에서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데 대해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인민일보는 경제 개혁 정책을 추진 중인 시 주석의 ‘롤 모델’이 덩샤오핑이라고 전했다. 인민일보는 시 주석과 덩샤오핑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키고 있다.

존경받는 개혁가 이미지 필요한 시진핑

지난해 국가주석 자리에 앉은 시 주석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다. 더욱이 시 주석은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지속가능한 성장의 필수 과제로 보고 있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파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시 주석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오로지 개혁·개방으로만 풀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 주석이 인민과 당내 인사들에게 한층 강화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중국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덩샤오핑 같은 ‘개혁가’ 이미지가 절실한 상황이다.

시 주석은 과감하게 ‘파리(하급 관료)’에서부터 호랑이(고위 관료)‘까지 모두 잡겠다며 부패척결에 나섰다. 이에 따르는 역풍을 덩샤오핑의 후광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다.

그는 태자당(太子黨·중국 혁명 원로와 고위 지도자들의 자녀) 출신이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생전에 덩샤오핑과 각별한 사이로 그를 도와 광둥(廣東)성에서 ‘개혁 전도사’로 통했다.

전형적인 특색을 지닌 중국 지도자

홍콩의 정치평론가 류루이사오(劉銳紹)는 현지 영자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정치 권력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위대한 전임 지도자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중국 정치권의 전통적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시 주석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덩샤오핑의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보수파의 목소리가 커져 개혁·개방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이에 덩샤오핑은 1992년 중국 남부를 돌며 개혁·개방에 대한 정당성과 그 의지도 다졌다.

시 주석이 당 총서기로 취임한 직후인 2012년 12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이뤄진 지역을 첫 시찰지로 삼고 개혁·개방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생전의 덩샤오핑이 강조한 말을 자주 인용하며 개혁 추진에 의미도 부여한다. “개혁·개방 노선은 100년 간 동요가 없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말은 시 주석이 해외 정상들에게 개혁에 대해 설명할 때 인용되곤 한다.

중국 안팎에서는 시 주석이 덩샤오핑 이후 가장 강한 권력을 거머쥔 지도자로 비치는 데 일단 성공했다고 본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시 주석이 전통적으로 총리의 영역이었던 경제 분야까지 직접 챙기면서 덩샤오핑 이후 최대 권력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오쩌둥 보다 덩샤오핑 지지도

이번 덩샤오핑의 탄생 110주년 추모 열기는 지난해 12월 마오쩌둥(毛澤東) 120주년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마오의 공과 논쟁이 제기됐지만 덩에 대해서는 그런 논란이 찾아보기 어렵다.

시 주석의 평가에서도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마오쩌둥 120주년을 맞아 시 주석은 “마오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진해야 한다”면서도 문화혁명 같은 마오의 잘못을 비중 있게 거론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최대 정치적 오점으로 거론돼온 ‘톈안먼 사건’에 대해서도 “덩샤오핑은 국내외 정치적 풍파에 직면해 냉정하게 관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며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했고 공산주의 이상을 수호했다”며 오히려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분위기는 ‘개혁개방 심화’를 최고 국정지표로 제시하는 등 덩샤오핑의 ‘적통’임을 자처하고 있는 시 주석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시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 취임 직후 첫 지방 시찰지로 광둥성 선전을 택해 덩샤오핑 노선 승계를 천명했다. 선전은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시작한 곳이다.

22일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10주년을 맞아 중국에는 그를 찬양하는 열기로 가득하고 과오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

지난 22일 환구시보는 베이징 등 전국 주요 7개 도시 18세 이상 1445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53.5%가 덩샤오핑을 숭경(崇敬)한다고 응답했다고 보도했다. 전날 실시된 조사에서 41.2%는 존경한다고 대답, 전체적으로 94.7%가 존경 이상의 평가를 내렸다. 불만과 비판적 입장을 보인 비율은 0.6%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21일부터 중국 전역에서 일제히 시판된 ‘덩샤오핑 평전(1904-1974)’은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곳곳에서 물량부족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국영 CCTV를 통해 방영되는 드라마 ‘역사적 전환기의 덩샤오핑’은 매일 약 6000만 명이 시청하고 있다. 드라마가 끝나면 20부작 다큐멘터리도 황금시간대에 방영될 예정이다.

국민 굶기지 않은 덩샤오핑

덩샤오핑 추모가 뜨거운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중국인들을 굶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8년 중국이 그의 결단으로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정한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정치투쟁 등으로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직전이었다. 하지만 1979년 270달러였던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6800달러로 늘었다. 장웨이웨이(張維爲) 푸단대학 중국발전모델연구센터 주임은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으로 중국에서 빈부격차가 확대되긴 했다. 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의 삶의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현재 중국의 문제가 얼마나 크든 간에 중국의 대부분 가정은 재산과 부의 혁명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22일 한 네티즌은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평등을 중시한 마오쩌둥은 인민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부자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지만 덩샤오핑 덕분에 중국인들의 삶이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다는 평가를 넘지 못했다.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맞아 중국 곳곳에 “샤오핑 동지, 조국과 인민은 당신을 영원이 그리워할 것입니다”란 표현이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국부(國父)로, 어떤 이들에게는 반신(半神)으로까지 추앙을 받지만 우상화 작업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상당수 국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덩샤오핑은 스스로를 인민의 아들로 불렀듯이 친근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덩샤오핑에 대한 추모 열풍을 현 지도부가 부추기고 활용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덩샤오핑의 유산을 받들겠다고 다짐하면서 그의 적자를 자임하고 있다. 개혁개방은 여전히 중국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의 도구로 통한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功)7, 과(過)3’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공산당내 누구도 과를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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