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골육상쟁사…“원수 같은 한 뿌리”
처절한 골육상쟁사…“원수 같은 한 뿌리”
  • 최수아 기자
  • 승인 2012.07.31
  • 호수 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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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쩐의 전쟁’ 11 - 대성그룹 ①

“감히 내 밥그릇에 탐을 내?”
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고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열한 번째 주인공은 한국 산업사에 연료 혁명을 이끈 대성그룹 ‘2세들의 재산싸움’ 막전막후다.

대성그룹의 역사는 한국 에너지 산업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장작이 기본 에너지원이었던 시절 연탄을 대량 보급해 근 현대사에 그야말로 연료혁명을 일으켰다.

191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수근 창업주는 가정 형편으로 인해 상고를 중퇴, 일본인 연탄회사에 취직하면서 연탄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국인이란 이유로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문을 두드린 끝에 입사, 성실함과 정직으로 내부 업무는 물론 외판 업무를 맡으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일본인들로부터 ‘가죽고리’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김수근 창업주의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그의 꺼질줄 모르는 끈기는 민둥산이었던 전국 산야를 짙푸른 녹지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다.
연료라고는 산에서 마구잡이로 베어오던 장작밖에 없던 1947년, 더 이상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김수근 창업주는 대구 칠성동에 연탄공장인 대성산업공사를 설립, 에너지 전문 기업인으로 거듭난다. 사실 말이 좋아 공장이지 직원 5명이 손으로 기계를 돌려 연탄을 찍어내는 가내공업 수준이었다.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에게 연탄은 숙명이었다. ‘잘사는 나라는 산림이 푸르다’라는 경영 지론에 입각, 남벌로 인해 황폐해져가는 산림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경북 문경새재 주흘산 입구에 있는 ‘대성그룹은 청정 산림지역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고자 한다”라는 푯말이 바로 그의 경영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김수근 창업주는 정부의 입산금지 정책과 맞물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공장을 세우고 연탄 수요를 빠르게 확산시켜 나갔다.

故 김수근 창업주 (왼쪽부터), 장남 김영대 대성 회장, 차남 김영민 서울도시가스 회장, 삼남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삼녀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에너지 산업의 선구자’ 김수근 창업주

1959년 왕십리 연탄공장을 인수, 대성연탄을 설립하면서 대성그룹의 성장곡선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활황기를 맞이한다. 은행 마감시간이 다 돼 바닥에 연탄재가 잔뜩 깔린 리어카에 돈 자루를 싣고 은행에 가면 은행원들에게 통사정을 하며 입금해야 했을 정도. 1970년대 초엔 국내 10대 그룹 안에 손 꼽혔을 정도로 사세가 대단했으며,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기업 1위를 차지 했을 만큼 대성그룹의 위상은 실로 엄청났다.

김수근 창업주는 여세를 몰아 국영이었던 문경탄광도 인수해 본격적인 탄광개발에 착수했다. 또 연이어 LPG가스·석유류 판매업으로 사업을 확장, 서민 연료 공급에 앞장서 나갔다.

1972년에는 석유대리점 대성산업을 설립, 대성가스공사와 대성연탄을 흡수 합병해 그룹의 간판기업으로 발돋움해 나갔으며 1973년과 78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대체에너지 보급에 눈을 돌려 1983년 대구도시가스를 설립하고 같은 해 서울도시가스를 인수, 열병합발전으로까지 사업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창원, 대구 등지에 연료펌프, 카브레이커 등 자동차 부품공장을 설립해 산업용 가스 생산분야로도 진출을 시도한다.

1980년 후반에는 국내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해외 에너지 자원 개발에서도 나섰다.

이후 김수근 창업주는 ‘번만큼만 투자한다’는 경영지론을 바탕으로 자기자본 비율이 선진국 우량기업 수준에 육박하는 견실한 재무구조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간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남이 하니깐 나도 한다는 식의 경영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체형에 맞는 사업을 하나씩 일궈가며 천천히 정도를 걸어 커가겠다”고 강조하던 그의 경영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이런 남다른 경영철학은 외환 위기에도 대성그룹을 굳건히 지켜내는데 큰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재벌 그룹들 마저도 비틀거리는 불황기에 되려 시세를 확장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선친 타계 후 ‘유산 전쟁’ 본격화

그러나 대성가에도 연탄사업의 몰락에 이은 변신이 늦어지면서 불행의 씨앗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연이은 계열분리로 그룹 규모마저 확 줄어든 가운데 2001년 김수근 창업주가 노환으로 별세하자 대성가에도 2세들의 재산싸움이 불거지면서 어김없는 경영권 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슬하에 3남3녀를 둔 김수근 창업주는 타계 전 2세들의 재산다툼을 우려해 유언장까지 남겼다. 3형제에게 각각 대성그룹의 주력사를 나눠주며 경영공조체제를 유지하도록 무엇보다 강조했다. 장남에게는 대성산업을, 차남에게는 서울도시가스를, 3남에게는 대구도시가스를 맡겼다. 사실 이들 사업군은 김수근 창업주가 생전에 독자적 영역을 잘 구축해 왔던 터라 그 유지만 잘 지킨다면 잡음이 생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세 형제는 김수근 창업주의 뜻을 끝내 외면했다. 김수근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치열한 유산싸움에 돌입했다. 대성산업이 보유한 서울 대구도시가스 지분을 넘기는 방식을 두고 양측의 해석이 엇갈린 것이 발단이 됐다.

장남인 김영대 회장이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해 보유 중인 두 도시가스회사의 주식을 시가의 2~3배되는 가격에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차남 김영민 회장과 3남 김영훈 회장이 발끈, 선친 타계 후 작성한 합의서대로 매매시점의 종가에 팔아야 한다고 맞서면서 길고 긴 유산분쟁이 본격화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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