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산에 산에 피는 꽃은
나의 연인 J에게 - 산에 산에 피는 꽃은
  • 김충교
  • 승인 2012.05.08
  • 호수 89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악산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등산 코스가 다양한 관악산을 오르던 기억으로 추억에 빠지곤 합니다.

관악산은 오르거나 암반 사이를 건너기에 조금은 아찔한 코스들이 있습니다.

숨이 턱에 찰 만큼 헉헉거리면서도 정상에 올랐을 때의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쉬지 않게 되지요. 밧줄을 잡고 기어오르는 코스도 부지기수입니다.

때론 악으로 깡으로 쉬지 않고 오르기도 했습니다.

5월의 관악산은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절정입니다.

땀이 넘치게 흐르지도 않고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하늘을 바라보기 좋은 때인 까닭입니다.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의 바람이 얼굴을 스칩니다.

매주 토요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관악산엘 갔습니다.

토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주를 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때론 참을 수 없어 연차 휴가를 내고 평일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혼자 오르는 등산길은 참 편안합니다.

보폭을 맞출 필요도 없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평지처럼 완만한 소로를 만나면 터벅터벅 그냥 걷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산에 올라 주위를 굽어보면 정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치어 사는 일상이 별거 아니라는 평정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잠깐이고 하산하면 먼지에 묻혀버리는 기억이긴 합니다.

그래도 그 잠시잠깐이 충전효과를 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새삼 관악산이 그리워진 이유는 땀 흘리는 운동이 그리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잠시잠깐의 마음의 씻김이 그리워진 탓입니다.

사실 변방에 내려온 이후 산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에도 관악산 못지않은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관악산과는 또 다른 맛을 내는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산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조차도 심드렁했으니까요.

그리고 제대로 된 산에 오르는 것을 등산으로 치는 객기도 있었구요.

그렇다고 산보삼아 오르는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가끔 뒷산을 가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햇볕에 노출된 코스가 적지 않아 신경이 거슬리기도 했구요.

오르고 싶다는 마음 보다는 그저 데면데면 한 정도였지요.

비록 산보 길 정도이지만 마음을 먹어도 부산하게 움직여야 하는 탓에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요일 오후의 뒷산은 사람이 많습니다.

멀리 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드는 탓입니다.

정작 길은 산보 길이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이 많아 분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해서 등산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평일의 늦은 오후였습니다.

사정이 있어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던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뒷산이라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뒷산은 그렇고 해서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습니다.

운동화에 티셔츠 차림으로 나갔습니다.

아주 낮은 산인데도 처음엔 부대끼더군요.

너무 오랜만에 산이라는 곳을 찾았기 때문일 겁니다.

관악산에 비하며 소요하는 정도의 산인데도 숨이 차올랐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묘한 자괴감이 들더군요.

몸에서 살짝 땀도 나면서 헉헉거리기를 계속했습니다.

누가 보았다면 부끄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몸의 근육과 호흡이 과거 등산하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더군요.

평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힘도 들고 해서 걸음의 속도를 줄이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한발 한발 내딛는데 급급해 눈을 돌리지 못했거든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산 속에 피어있는 꽃들은 기묘한 느낌을 줍니다.

주변의 푸름을 거스르는 것 같으면서도 튀지 않는 모습입니다.

군락을 이루기보다는 혼자 떨어져 피어 있는 꽃들이 더 아름답습니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눈길을 끌지 않으면서도 거슬리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하는 중얼거림이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를 읊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평일 늦은 오후 오붓한 산길을 따라 홀로 걸으면서 부르는 노래는 맛이 있습니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혼자서 저만치 피어 있네

 

하산 길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서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뻗은 편백나무가 시원해 보였습니다.

그대로 하늘 끝까지라도 뻗어갈듯 한 기세였습니다.

나무처럼 지향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갈 곳이 있으면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지향하는 바가 있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여유를 찾자는 다짐 보다는 마음의 수양이 필요해 보이더군요.

10년도 훨씬 넘은 일입니다.

친한 선배와 함께 전남 여수의 향일암을 간 적이 있습니다.

임포라 부르는 포구 위에 자리한 향일암은 탁 트인 남해바다를 안고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암자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암자로 가는 좁다란 오솔길은 말 그대로 오붓합니다.

그 길을 걷다보면 세상 풍진은 잠시 내려놓게 됩니다.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어깨의 짐이 중량을 잃고 사라집니다.

암자로 향하던 길에 내려오는 한 스님을 스쳐 지났습니다.

밀짚모자에 바랑을 짊어진 낯빛이 하얀 젊은 비구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피어있는 꽃의 모습이었습니다.

수행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거냐고 동행한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산에는 사계절 모두 꽃이 핀다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