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4월은 갈아엎는 달"
나의 연인 J에게 - "4월은 갈아엎는 달"
  • 김충교
  • 승인 2012.04.02
  • 호수 8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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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에 청년기를 거친 사람들은 압니다.

희망은 한순간에 절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은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어졌던 기나긴 동면의 겨울은 절망이었습니다.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었지만 세상은 얼어있었습니다.

신군부의 서슬에 시간은 정지해 버린 듯했습니다.

공간을 가르는 공기의 밀도 역시 묵직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맑은 날에도 대기에는 중량이 느껴지는 공기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질린 청년들은 질식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누르면 터지는 법입니다.

매년 봄기운이 짙어질 때면 청년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4월과 5월은 기폭제가 됩니다.

4.19와 5.18이라는 휘발성 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맘 때 쯤 이었을 겁니다.

낮과 밤이 기온이 확 다른 때였으니까요.

한밤중 대학 캠퍼스 게시판에 격문이 붙었습니다.

누군가 상주하던 정보 기관원의 눈을 피해 붙인 대자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격문은 선동적 문구의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편의 시였습니다.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4월은 갈아엎는 달’

아무런 군더더기를 달지 않은 시 한편이 걸려 있었습니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시인 신동엽의 ‘4월은 갈아엎는 달’ 이었습니다.

초판 발행 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발매가 금지된 <신동엽 전집>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

당시 신동엽 시인은 당국에 의해 불온한 시인이란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40세의 한창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등진 그입니다.

사후에 출간된 전집마저 금서가 된 것입니다.

정말 코미디이고 개그가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 읽는 시는 아니었지만 그날 대자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언 땅이 녹는 봄이었습니다.

농부들은 봄날 씨앗을 뿌리기 위해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야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물론 우연이었을 겁니다.

신동엽 시인의 시가 대자보에 걸렸던 그해 봄 캠퍼스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진압경찰의 군화소리가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짱돌과 조각난 보도블럭이 경찰의 방패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교차하는 대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하늘은 포연이 가득한 지상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몰려왔습니다.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권력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배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댕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절로 그냥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격문처럼 붙었던 시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갈아엎지 않으면 땅에 새싹은 움트지 않습니다.

그냥 불모지가 되고 말 겁니다.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각 정당은 달라지고 있다며 유권자들을 향해 교태를 부리고 있습니다.

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몸짓 일색입니다.

그러면서도 솔깃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속는 줄 알면서도 다시 또 쳐다보게 됩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읍소와 허풍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야 모두 시원찮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먼 산 바라보듯 딴청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앞으로 4년 동안 그들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뿐만이 아닙니다.

멀게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쥐고 흔들 수도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갈아엎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원스럽게 쟁기질 한번 했으면 싶습니다.

그런데 힘껏 파 뒤집어도 기름진 땅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메마른 맨땅에 대고 헤딩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합니다.

잘 들게 벼린 쟁기 날만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켜지지가 않습니다.

멀쩡한 머리 깨지고 농기구 버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렇다고 주권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해서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볼 작정입니다.

공약 사항도 꼼꼼히 챙겨보고 후보들의 삶의 이력도 검증해야겠습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정치적 구도도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4.11 총선은 12월 대선의 전초전이니까요.

더 이상 막가는 정치 지도자를 견디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동엽 시인의 진정성을 가슴에 새기고 싶기도 하구요.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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