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린의 달콤함이 삼성을 유혹했다
사카린의 달콤함이 삼성을 유혹했다
  • 최수아 기자
  • 승인 2012.02.20
  • 호수 8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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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쩐의 전쟁’ 1 - 삼성①

“감히 내 밥그릇에 탐을 내?”
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신문]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최근 7000억원대의 상속 소송에 휘말린 삼성가다.

이병철 회장 <자료 사진>
지난 14일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삼성가의 장손 이맹희씨가 동생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무려 7000억원에 달하는 상속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선친이자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폐암으로 세상으로 떠난 지 25년 만에 상속 재산을 놓고 동생에게 ‘정면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이맹희씨는 이건희 회장이 명의 신탁 사실을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 명의로 변경, 자신의 상속분에 해당하는 주식과 배당금을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맹희씨의 주장대로 차명주식과 관련해 사실관계가 확인될 경우 국내 최대 기업의 지배구조가 뒤바뀔 수 있을 만큼 사상 초유의 상황이 예측된다.

73년 아버지의 눈 밖에 나 경영 일선서 밀려난 이맹희씨는 은둔과 유량생활을 자처, 알려진 거주지마저도 정확치 않을 만큼 그동안 외부에 노출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삼성가와는 완전히 절연된 존재였다.

1993년 펴낸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로 잠깐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으나, 금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 그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형제의 난’을 자처했을까. 송사를 앞둔 삼성가 형제들의 뿌리 깊은 앙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배경에 대한 답이 숨어있다.

 ‘사카린 밀수’ ‘모반’ … 삼형제에 무슨 일이?

이병철 회장은 부인 고 박두을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인희, 이맹희, 이창희, 이숙희, 이순희, 이덕희, 이건희, 이명희 등의 7남매와 일본인 부인 구라다상과의 사이에서 낳은 태휘, 혜자 남매까지 호적에 입적된 자녀만 무려 9남매를 두었다.

이맹희씨는 이 가운데 일찍이 삼성 후계자로 지목됐다. 그럴 것이 장자 승계 원칙이 누구보다도 엄격한 재벌가문의 장남이기 때문이다.

이맹희씨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제일비료 전 회장직을 비롯해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성균관대 등 주력 계열사의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의 직책을 맡을 만큼 삼성그룹 전반에 걸쳐 경영수업은 물론 이병철 회장과 삼성그룹 중대사의 대부분을 함께 진두지휘했다. 지금의 삼성전자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차남인 고 이창희씨는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제휴해 새한미디어를 설립 회장직을 맡았다.

삼남인 이건희 회장은 당시 일본 유학 중으로 귀국 후 동양방송을 비롯한 미디어 계열사가 맡겨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1966년 9월 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을 기점으로 삼성가의 경영권 승계구도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휘몰아친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비료공장 건립이 일생일대의 숙원사업이었다. “내 생전에 큰 비료 공장만 하나 지으면 경제계를 물러나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이병철 회장의 비료공장 꿈은 강렬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료공장 건립은 4.19, 5.16 쿠테타 등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유아무야되다 8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맹희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 다시 당선되기 위해 대형 비료 공장을 조속히 지어야 할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정권 차원에서 시작된 비료 공장 건립은 그렇게 자연스레 삼성에게 넘어왔고 아버지로서는 오랫동안 진행해 온 일인 비료 공장 건설 제안을 물리칠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잘못 뀌어진 단추는 결국 말썽이 되는 법. 공장을 짓기 위해 정부의 보증아래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4000여만달러의 상업 차관을 들여오면서 이병철 회장과 두 아들 이맹희씨, 이창희씨간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단초가 제공된다.

당시 현장을 지휘했던 이맹희씨 증언에 따르면 “미쓰이측에서 차관을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 필요한 기계로 대신했다. 또 이와 함께 당시 관행이었던 리베이트 100만달러도 함께 삼성에 제공됐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청와대에 알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제한했다. 결국 정부기관과의 공모아래 엄청난 규모의 밀수가 시작됐다. 청와대는 돈이 필요했고, 삼성은 건설용 장비가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삼성의 밀수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판, OTSA 등 다양했다. 문제는 바로 사카린의 원료인 OTSA에서 발생했다. 이는 일반시장에서 팔지 않은 물건이라 삼성은 미리 팔 루트를 정하고 밀수 했는데, 삼성에서 공급받기로한 금북화학의 이전 OTSA 공급업체가 어느 날부터 금북화학이 OTSA를 가져가지 않자 이상하다 싶어 뒷조사를 하면서 삼성의 밀수 실체가 외부에 발각됐다.

삼성은 이를 덮기 위해 당시 벌금을 내면서까지 모든 수를 동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정권의 보호도 소용없을 만큼 언론의 집중 공격에 결국 이창희씨가 사건 책임자로 모든 걸 짊어지고 감옥살이를, 이병철 회장은 경영에서 자진 은퇴하기에 이른다.

깨진 장자 승계 원칙 ‘파란 예고’

그렇게 이맹희씨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성의 주력 계열사를 총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사카린 사건’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차 있던 이창희씨의 ‘모반’ 사건이 터지면서 이들 세 부자는 깊은 불신에 휩싸인다.

이창희씨가 자신의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외화 밀반출에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탈세를 일삼았다며 증거 자료까지 첨부해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창희씨가 출소 해 나와 보니 기업 운영은 형이 다 하고 있고 옥살이까지 한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배제 된게 사건의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결국 이창희씨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귀국하지 말라’는 이병철 회장의 엄명을 받고 미국으로 쫓겨났다. 이맹희씨도 73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에 대해 이맹희씨는 아버지의 경영 복귀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회고 하고 있다.

훗날 이창희씨는 이병철 회장에게 용서를 구하러 급거 귀국, 틀어진 관계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이맹희씨는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등 3개 계열사에만 주력하라는 이병철 회장의 주문을 뒤로 한 채 일본으로 떠난다. 이때부터 여기저기 유랑생활을 즐기기 시작, 아버지와 악화일로의 관계에 접어든다.

당시 일각에서는 그 배경을 두고 이맹희씨가 ‘경영 능력 부족으로 6개월 만에 경영자 자리에 쫓겨났다’, ‘부자지간에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알력다툼이 일어나 아버지 눈 밖에 났다’며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심지어 ‘성광증’에 ‘정신이상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더구나 삼성가 형제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유리성’이라는 소설책이 90년 출간되면서 소문이 마치 기정사실화 되는 듯 했다. ‘유리성’ 집필한 소설가 오정인씨가 이맹희씨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오성그룹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유리성’은 자동차 편집광인 오성그룹의 삼남이 엘리베이터걸과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이로 인해 질투심에 불탄 부인이 그 엘리베이터걸을 쫓아낸다는 스토리도 담고 있어 당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맹희씨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회고록에서 “‘유리성’과 우리집 이야기는 전혀 관계가 없다. 또한 나는 ‘성광증’을 앓고 있지도 않다. ‘정신병’은 아버지가 날 돌아오게 하려는 압력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부산 모 병원에 양심 없는 의사를 찾아가 돈 300만원을 쥐어주고 내가 정신병이란 의사 소견서를 받아냈더라. 뿐만 아니라 은행 대출까지도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막았으며, 부산 별장에 묶을 당시 사람을 시켜 집안 내 세간 일체를 몽땅 가져갔다. 대구 땅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아버지가 처분하고 나자 돈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해명했다.

사실 이맹희씨에게는 여러 번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의 뒤 늦은 고백처럼 자존심을 조금만 죽이고 아버지 곁에서 기다렸다면 모든 문제는 잘 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회마저 강하게 거부했다.

그렇게 이맹희씨가 후계구도에서 또 삼성가로부터 철저히 멀어져 가면서 일본서 유학 중이던 이건희 회장이 삼성가의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한 때 이창희씨가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병철 회장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들을 불러 모은 가운데 경영권 일체를 이건희 회장에게 넘겼다. 향후 삼성가의 불어 닥칠 더 큰 파란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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