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기술과 예술
"나의 연인 J에게"-기술과 예술
  • 김충교
  • 승인 2011.12.19
  • 호수 8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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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교 일요신문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귀에 익은 이름이 일부 매체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반가운 이름은 아닙니다.

그는 현재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고문 기술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근안입니다.

새삼 그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때문입니다.

김 고문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거든요.

고문 후유증으로 수년 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 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김 고문의 존재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정치전면에서 물러나 있었으니까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현역에서 물러나면 조명을 받기 힘듭니다.

정치권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원내와 원외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권 인사들은 원내에 진입하려고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비중은 있지만 원외이니까 동정이나 근황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김 고문이 모습을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투병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도 그는 항상 어딘지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눌한 말투는 낯선 느낌을 주었습니다.

곧고 바르지만 어딘지 어색한 걸음걸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항상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 1985년 서울대 민주화 추진위의 배후조정혐의를 받고 끌려갔습니다.

그곳은 악명 높은 서울 용산의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모두 11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시달렸습니다.

김 고문을 취조하며 고문을 가한 당사자는 이근안 경감이었습니다.

9월 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그는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김 고문은 증언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갈협박, 집단폭행, 잠 안 재우기, 굶기기, 동물적 능욕 등이 이어졌다고.

김 고문은 결국 항복했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김 고문을 알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라고 했답니다.

김 고문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 김 고문은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눈이 가려지기 전 가학자들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기억했습니다.

참혹한 고통의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을 쫓아간 겁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통해 날짜를 가늠했습니다.

몸은 망가져도 그의 의식은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지에 대해 감탄과 경외감이 들 뿐입니다.

하지만 상상컨대 그런 상황을 겪은 그에게 감탄과 경외감이란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의 자기기만일 수 있으니까요.

요즘 다시 주목을 끄는 기사가 있습니다.

트위터 상에서 한창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2월에 한 시사주간지에 실렸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인터뷰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요서울>이 보도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직격토로.

인터뷰에서 이근안은 ‘심문은 예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몸을 담았던 매체인지라 기사를 찾아서 꼼꼼히 보았습니다.

참 잘된 인터뷰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일해본 적은 없지만 기자의 섭외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더군요.

무대에 나오지 않으려는 이근안을 끌어냈으니까요.

또 인터뷰어인 기자의 일문일답식 접근방법도 눈에 띄었습니다.

가능한 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인터뷰 상대인 인터뷰이의 말을 그대로 옮겼더군요.

더러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페이스에 말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읽는 내내 불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근안의 기억과 주장은 참으로 넋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강압심문은 인정하지만 고문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기고문에 대한 주장과 해명은 한마디로 코미디였습니다.

취미삼아 만든 모형비행기 모터에서 빼낸 건전지 2개로 겁을 준 게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애국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붙는 수식어인 ‘고문 기술자’라는 말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굳이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고 했더군요.

클라이맥스는 따로 있습니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두뇌싸움을 벌인다고 했습니다.

선수끼리의 대결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무방비한 사람을 손바닥에 쥔 사람이 선수끼리의 대결이라니요.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술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지식과 능력 역시 도구입니다.

반면 예술은 상상력이고 창조입니다.

기술과 예술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나치 전범 중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태인 학살을 기획하고 실행을 지휘한 실무자입니다.

6백만 여 명의 유태인의 그가 계획한 처리방식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법정에 섰습니다.

방탄유리가 둘러쳐진 피고석에 앉은 그는 어리둥절해 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재판을 받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답니다.

자신은 한 사람의 기술자로서 주어진 과제를 실무적으로 처리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초 그의 계획은 천백만 명의 유럽거주 유태인을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 계획에 아쉬움마저 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기술자임을 자처했지만 예술 운운하지는 않았습니다.

참회와 반성도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해도 되는 건지 예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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