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나의 연인 J에게" -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 김충교
  • 승인 2011.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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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교(skyeapril@naver.com)일요신문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한때 저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소설읽기를 좋아한 탓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을 겁니다.

읽기와 쓰기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읽어지니까 쓸 수도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무엇을 쓸 것인지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냥 쓰면 제가 읽는 것처럼 누군가 읽을 것이라고 여겼나 봅니다.

취향을 일반화시켰던 겁니다.

20대 초반의 일입니다.

지금 뒤돌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막연히 갖는 일종의 취향을 개인의 능력으로 오판한 겁니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는 글쓰기를 ‘글 감옥’이라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가 이럴진대 달리 말이 필요 없는 일이지요.

제겐 항상 마음속으로 의지하는 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등단을 한 기성작가는 아닙니다.

당연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구요.

하지만 그의 창작욕과 필력은 남다릅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씁니다.

픽션이지만 넌 픽션에 근거한 창작을 하는 스타일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관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보다 한 살 연배이긴 하지만 친구처럼 때론 형님처럼 여기는 사이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터놓고 카운슬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봐야 푸념이고 하소연이지만 적지 않은 위안을 얻습니다.

그의 문화적 소양은 폭넓으면서도 깊이가 있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은 물론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를 평가할 때 저는 서슴없이 문화인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소양이나 지식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인드가 문화인이라는 거지요.

그는 아는 게 많다고 절대 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상식적이라는 얘기입니다.

설사 자기와 달라도 상대의 생각과 의견에 귀 기울이고 이해를 표합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굴곡도 있었고 많이 흔들리기도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간의 사정은 짐작만 할 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는 가끔 자신이 쓴 창작물을 띄워주곤 합니다.

읽어보면 짧은 한 편의 시에서도 숨은 노고가 엿보입니다.

진정성이 묻어있고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거든요.

많은 사색과 회상이 바탕이 된 작품임을 느끼게 됩니다.

아마 그는 ‘글 감옥’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최근 그가 탈고한 한 편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읽기를 멈춘 지 오래된 터라 신선했습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무거웠습니다.

색깔도 회색빛을 띠고 있어 우울해 보이더군요.

작품이 작가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겁니다.

그래도 좀 가벼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가벼움이란 헤픈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벼움이란 경쾌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기 속을 흩날리는 깃털처럼 날아가는 겁니다.

공기의 밀도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지고 날리는 형상도 다르겠지요.

밀도는 읽는 이가 가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밀도는 엄연한 개인차가 존재하거든요.

얼마 전 잘 나가는 TV프로그램에 가수 조용필이 출연했습니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조용필 특집을 마련했더군요.

조용필은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입니다.

이의를 달 수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그의 노래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각자 기호는 다르겠지만 그의 노래는 일세를 풍미했습니다.

지금도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어떤 가수도 대적하기 힘들 겁니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라는 곡이 있습니다.

경쾌한 리듬의 곡으로 흥얼거리기에 제격인 노래입니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의 뒷면에는 진한 슬픔이 깔려 있습니다.

‘그대 긴 밤을 지 샌 별처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은 별이 밤을 새우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별을 보면서 밤을 새운 적은 있을 겁니다.

‘내 곁에 있는 모든 것 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종교적인 기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이나 ‘아미타불’을 연상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한 편의 잘 된 소설을 읽는 기분이 됩니다.

언뜻 들으면 리듬과 가사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주는 메시지는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 묘합니다.

저만해도 하루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합니다.

바닷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아득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쯤에 이르면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빠져 죽겠구나.

갑자기 20대 청춘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는 한없이 진지했습니다.

상황자체가 진지함을 요구하기도 했구요.

참여와 순수, 또는 본격문학에 대한 논쟁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토양이 무수한 가지들을 잉태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남은 가지들은 앙상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386이니 486이니 하는 말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공기의 밀도는 달라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좀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진지함이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한 쪽으로 치워두었던 소설읽기를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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