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길을 찾아 떠나는 양
“나의 연인 J에게” - 길을 찾아 떠나는 양
  • 김충교
  • 승인 2011.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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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교(skyeapril@naver.com)일요신문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제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도시 외곽이기 때문에 차량은 뜸한 편입니다.

베란다에 나오면 항상 길을 바라봅니다.

물론 길을 보기 위해 베란다에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가 길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무심히 길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과연 저 길 끝은 어디이며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사실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고 있는지는 잘 압니다.

매일 오고가는 아주 낯익은 길이거든요.

그런데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길은 다시 상념이 됩니다.

서울에서도 그랬습니다.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 길을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출퇴근 시 하루에 꼭 두 번은 다니는 길인데도 늘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길을 따라 가면 과연 끝은 있을까.

한마디로 ‘길 잃은 양’의 마음이 되는 겁니다.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이유로 헤맬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더군요.

참 많이 헤매고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방기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음을 다잡으려 여러 번 작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심은 잠시 잠깐 뿐입니다.

약해 빠진 심사가 쳇바퀴를 멈추게 못하더군요.

마음속으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 보다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길을 찾아 떠나는 양’이 되어보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긴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입니다.

고작 일신의 안위를 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큰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저는 일개 범부에 불과하니까요.

요즘 ‘길을 찾아 떠나는 양’에 비유할 수 있는 인물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의 무리를 떠나 길을 찾으려는 모색이 돋보입니다.

바로 안철수 교수 얘기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국민들을 대신해 그는 길을 찾아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가 찾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정치권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국민들은 반색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보인다고 느끼고 있는 겁니다.

안 교수의 서울시장 출마설이 나오자 정치권은 일단 주판알을 튕겼습니다.

한나라당은 야권의 분열을 예견하며 미소를 지었지요.

반가운 일이라며 박장대소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은 착잡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내놓고 안 교수의 등장을 말릴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라고 한탄했을 겁니다.

민주당은 서울시장은 야당 쪽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으니까요.

복잡한 셈법에 빠진 정치권은 앉아서 일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여론조가 결과 안 교수가 50%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왔거든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5%의 지지를 받았구요.

안 교수의 급부상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결과입니다.

그러나 기존 정당을 모두 포함한 다자간 구도일 경우는 다를 것이라 예측됐습니다.

지지가 분산될 것이기 때문에 각축을 벌일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론조사 결과가 주는 충격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애써 미소를 감추려던 한나라당은 넋이 나갔습니다.

민주당 역시 머쓱해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대정당이라는 틀 속에 안주하던 여야에게 서울시민들이 펀치를 날린 겁니다.

우매하다고 얕잡아 보던 유권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정치지도자들이나 기업의 오너 등 리더들은 착각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행동은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래 것들은 그저 따라오면 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주인과 머슴의 논리에 빠져들기 쉽거든요.

물론 말은 국민이 주인이고 종업원이 회사의 주인이라고 떠벌립니다.

그러니 주권의식을 갖고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껌 씹듯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닥정서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표면적인 것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을 하거든요.

숨겨진 실상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쓴 소리로 실상을 귀띔해도 귀를 닫고 오히려 상대를 질책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된다는 논리를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절을 쥐락펴락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사부대중이 주지를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주지가 기득권의 엄호를 받고 있어 요지부동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을 바꾸어야지요.

세력이나 개인의 의지에 좌우되는 절이라는 기존의 틀을 바꾸는 겁니다.

안철수 교수는 이 같은 인식의 변화와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습니다.

변화를 촉구하고 기다리는 일은 한계가 있다는 거지요.

이는 스스로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춤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해서 그는 ‘길을 찾아 떠나는 양’을 자처했는지 모릅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울타리를 박차고 나간 겁니다.

반향은 의외로 컸습니다.

안 교수처럼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았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그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자신이 닦은 길을 내어주었습니다.

큰 감동을 주었음은 물론이구요.

정치권에서는 50%가 5%에게 양보하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정치권에서는 정신이 나가지 않았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할 겁니다.

혹은 더 큰 꿈을 위한 위선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이미 나버린 길이라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변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이제 제2, 제3의 안 교수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 떠나는 양’에게 기름진 초원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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