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모욕
"나의 연인 J에게" - 모욕
  • 김충교
  • 승인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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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교(skyeapril@naver.com)일요신문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변방에서의 휴가는 떠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척이 산이고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바람을 쐬면서 놀 곳이 지천입니다.

해서 이번 여름에도 어딘가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도 했지요.

대신 서울에 사는 친척 형님가족을 부추겼습니다.

한번 내려오시라.

피곤하게 운전을 하지 않아도 단박에 올 수 있다.

사고만 피하면 KTX로 2시간이면 충분하다.

사실 형님 가족은 서울 살 때부터 가까운 사이입니다.

피는 섞이지 않은 처가 쪽 형님이지만 살짝 서로 코드가 맞거든요.

코드라고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가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주에 있어서는 의기투합이 되거든요.

사실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워낙 반듯한 스타일이거든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속 깊은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충고를 달게 받아들이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거듭된 꾐에 넘어가더군요.

그렇게 변방에서의 휴가가 시작됐습니다.

형님이나 저나 늦은 결혼을 한 처지여서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때문에 아이들 위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이야 한적한 곳에 터를 잡고 눌러 앉으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아이들에겐 볼거리와 놀거리가 필요합니다.

첫날 변방 인근의 동굴 관광지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에선 꽤 유명한 곳이지요.

바깥 날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서늘한 동굴투어를 했습니다.

침출수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수로를 따라 보트도 탔습니다.

오싹할 정도로 춥더군요.

반팔 셔츠로는 감당하기 힘든 동굴 속 공기 속에서 겨울을 느꼈습니다.

말 그대로 피서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동굴 속 공연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연이 예고돼 있었거든요.

동굴 속에 설치된 공연장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입구에는 간이매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엿장수 차림의 한 사내가 장단에 맞춰 호박엿을 치고 있더군요.

크게 틀어놓은 확성기에서는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호박엿을 사는 이들이 많아지더군요.

시간이 되자 엿장수가 마이크를 잡고 공연시작 소식을 알렸습니다.

중국 기예단의 ‘아크로바틱’ 공연이 곧 시작되니 큰 박수 바란다고 하더군요.

호박엿을 사달라는 멘트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아크로바틱’이라는 말을 듣고 10여 년 전에 보았던 공연이 떠올랐습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아내와 함께 공연을 본 적이 있거든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명한 유럽출신 공연팀이었습니다.

공연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엿가락처럼 휘어질 수 있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숨죽이며 온 몸이 긴장된 상태에서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거든요.

그러나 동굴 속 중국 기예단의 공연은 아주 불편했습니다.

이제 갓 10대에 접어든 듯한 소년소녀들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열 살이나 열한 살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슬아슬한 동작을 연출했습니다.

몸이 휘어지는 정도는 대단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들렸습니다.

아이들도 신기한 동작에 입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몹시 불편했습니다.

옆에 앉은 아내도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저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으며 또 얼마나 맞았겠느냐고.

형님 부부도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무심하게 호박엿을 씹으며 공연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더군요.

10대 초반에서 10대 후반의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중국기예단.

그들은 집에서 엄마 아빠에게 재롱이나 투정을 부릴 나이입니다.

평범한 한국의 아이들이라면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애들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짙은 화장을 하고 무대에 서 있습니다.

그것도 이국땅의 한 변방의 관광지에서 말입니다.

아차 실수하면 크게 다칠 위험한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억지 미소를 지은 채로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려 합니다.

가뜩이나 썰렁한 동굴 안의 공기가 더욱 춥게 느껴지더군요.

라스베가스에서의 ‘아크로바틱’ 공연은 기예였습니다.

공연자들 모두 성인들이었거든요.

그러나 이날 동굴 속의 공연은 아동학대나 착취였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호박엿을 치는 엿장수 차림의 사내는 가위질에 힘을 더했습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보자 모욕감이 밀려왔습니다.

그 사내가 휴가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구경나온 사람들을 깔보고 있다고 생각됐거든요.

아니, 그 사내는 얼굴마담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이 같은 공연은 이곳에서만 열리는 게 아닐 테니까요.

전국의 소규모 관광지에 유사한 공연이 널려있을 겁니다.

그리고 배후에는 거대한 공연유통조직이 움직이고 있을 거구요.

개인적인 모욕감은 감정적인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미리 알고 원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공연에 동참했으니까요.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아동학대와 착취의 공범일 수 있는 거지요.

오히려 모욕감은 중국 기예단 소년소녀들이 느껴야 마땅합니다.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들 중에는 조금 나이가 든 축인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소년이 있었습니다.

두 소년이 전체 공연을 리드했으니까요.

그중 리더인 듯 보이는 한 소년은 공연 내내 표정이 없었습니다.

억지웃음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더로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긴장한 탓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과민한 지도 모르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소년의 표정이 어른거리는군요.

1959년에 제정된 UN 아동권리선언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아동은 학대, 방임,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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