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 J에게" - 연애하라!
"나의 연인 J에게" - 연애하라!
  • 김충교
  • 승인 2011.0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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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교(skyeapril@naver.com)일요신문기자→경향플러스 편집국장→일요서울 편집국장
친지의 결혼식이 있어 서울엘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당일 코스였습니다.

약간 불안했지만 ‘사고철’로 불리는 KTX를 이용했습니다.

빠르니까요.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이면 충분하거든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기차역의 매점에 들렀습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을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역사나 버스터미널의 매점에서는 취향에 맞는 볼 만한 책을 찾기 힘듭니다.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딱 1권이 남아 있더군요.

언론의 서평을 통해 알게 된 <분노하라>가 그것입니다.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아 맞춤이었습니다.

뭘 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아주 딱 이었습니다.

재킷의 바깥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였거든요.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사출신인 스테판 에셀.

현재나이 93세인 그는 젊은이들을 향하여 ‘분노하라!’고 외칩니다.

그는 21세기를 유사 이래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가장 큰 시대로 봅니다.

그는 또 이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돈을 쫓아 질주하는 경쟁을 부추긴다고 질타합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는 최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라며 손을 놓고 있다는 겁니다.

뜨끔하더군요.

그러면서 스테판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단언합니다.

무관심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분노하라>를 읽으면서 저는 잠시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이게 과연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프랑스 사람이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책장을 덮고 저는 잠시 차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는 빠르게 풍경을 뒤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풍경은 주마간산 식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불현듯 풍경을 밀어내며 달리는 열차가 우리의 삶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분노하고 있는가.

분노하고 있다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를.

순간 김수영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김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 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분개하면서도 진짜 분노할 일에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지요.

혹은 분노하면서도 속으로 삼키는데 익숙합니다.

아예 구경꾼으로 방관하기도 합니다.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수십 년 전 김 시인은 이미 우리의 비겁함을 예견했던 겁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군대에 간 젊은이가 주검으로 돌아옵니다.

갖은 모욕과 왕따에 상처받은 젊은이가 목을 맵니다.

때론 격분해 전우에게 총구를 겨눕니다.

그래도 내 아들 일이 아니라고 가슴만 쓸어내립니다.

책임회피에 급급한 높은 분들의 말씀에 혀만 내두릅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신세만 한탄할 뿐입니다.

서울역 광장은 기분만큼이나 잔뜩 찌푸린 하늘을 이고 있더군요.

서둘렀습니다.

돌아갈 표를 쥐고 있는 상태라 급하게 결혼식장에 얼굴도장을 찍었습니다.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뷔페음식으로 허기를 때웠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신이 피곤했으니까요.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통로 측 좌석에 앉은 탓에 옆자리를 보게 되더군요.

아주 잘생기고 예쁜 젊은 남녀가 있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대학생들 같았지만 일행은 아닌 듯 했습니다.

두 젊은이는 각자 좌석 테이블을 펴놓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더군요.

여학생은 태블릿 PC로 악보를 보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학생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남학생은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 검색이나 트위터를 하는 듯 했구요.

시선은 각자의 모니터에 가 있었지만 신경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밤기차의 정적 속에서 유심히 관찰을 했거든요.

서로 옆 사람을 의식하는 낌새가 묻어났습니다.

흥미로워졌습니다.

누가 먼저 말을 걸 것인지 추이를 살폈습니다.

일만 잘되면 괜찮은 커플이 되겠다 싶었으니까요.

손놀림이나 숨소리에도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서로에게 엄청 관심이 있고 상대가 옆구리를 찔러오길 기다리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진도가 나가지 않더군요.

오히려 제가 애가 탈 정도였으니까요.

남학생에게 오렌지 주스라도 하나 사서 건네 보라고 얘기하고 싶더군요.

제가 내려야 하는 역은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 눈치를 살피며 딴전을 부리고 있더군요.

누가 시작하든 작업(?)을 걸고 연애가 시작되길 바랐습니다.

‘연애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에 어울려 보였거든요.

잘 자란 젊은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분노를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하려면 당장 제가 비겁함을 버리고 분노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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