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거물급 PD ‘가짜편지’에 놀아났다
재벌총수, 거물급 PD ‘가짜편지’에 놀아났다
  • 이수영 기자
  • 승인 20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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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 재수사 불가

- 국과수 “故 장자연 자필편지는 가짜” 결론
- ‘장자연 리스트’ 31인 재수사 동력 상실
- 경찰 “관계망상 빠진 전씨 자작극” 종결

결국 가짜였다. 2년 만에 재점화 된 ‘장자연 사건’이 유력한 물증으로 제시됐던 고인의 자필편지가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싱겁게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일명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유력인사들에 대한 재수사도 불가능해졌다.

경찰은 당초 고인의 편지가 진본으로 밝혀지면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편지가 가짜라는 결과가 나온 이상 사실상 재수사는 불가하다는 얘기다.

 


탤런트 故 장자연씨가 사망한지 2년 만에 공개돼 큰 파문을 일으킨 자필 편지가 가짜로 드러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지난 16일 오전 10시 전모(31·구속수감)씨가 고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 편지 원본에 대한 필적감정 및 지문감식 결과를 발표했다.

“편지, 제3자가 썼다”
국과수 측은 “전씨가 가지고 있던 편지들은 故 장자연씨가 아닌 제3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국과수 관계자는 “경찰로부터 의뢰받은 필적을 감정한 결과 고인의 친필이라고 주장되던 편지 원본은 장씨 필적과 상이한 필적이고 이 필적과 광주 교도소에서 전씨로부터 압수한 적색의 필적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동일 필적으로 드러난 두 필적과 전씨의 필적이 동일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문건이 각각 정자체와 흘림체인 관계로 대조자료로써는 부적합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이들 필적 간에는 일부 반복적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기재하는 습성들이 공통적으로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전씨가 보관 중이던 장씨의 편지가 가짜로 드러남에 따라 장씨로부터 술접대와 성접대를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유력인사들에 대한 재수사가 개시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당초 경찰은 국과수의 감정결과 문제의 편지들이 장씨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판명 날 경우 사건을 전면 재수사할 방침이었다.


증권가를 중심으로 떠도는 ‘장자연 리스트’에는 20여명의 실명과 직책, 신상 등이 망라돼 있다. 여기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L그룹 총수부터 C그룹 오너, C신문 오너 부자(父子), J신문 광고책임자, 유명 드라마 제작자 S씨, 지상파 프로듀서 K, J씨 등이 포함돼 있다.


2009년 경찰은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압수수색 27회, 통화내역 조회 14만여 건, 계좌·카드 사용내역 조회 955건, 참고인 118명을 조사했다. 이후 언론사, IT업체, 금융업체 대표 등 해당 인사들은 강요죄 공범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박철 부장검사)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해 조선일보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을 지난 15일 피고소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


이 의원은 검찰조사에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차원에서 발언한 것으로, 국회 안에서 대정부 질문의 일환으로 한 발언에 대해서는 의원의 면책특권이 적용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의원은 2009년 4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씨 관련 문건에 장씨가 술자리에서 모셨다는 조선일보 고위 임원이 있다”며 실명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다.

 

전씨, 왜 가짜편지 만들었나
문제의 편지들이 고인의 친필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옴에 따라 장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한 전씨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씨는 왜 총 50여통, 231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편지를 일일이 조작해야 했을까. 이 같은 작업이 혼자 가능하긴 한 걸까.
 

범죄전문가들은 장기간 독방을 쓴 전씨가 망상장애를 갖고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자기의 공상을 실제 일처럼 말하면서 자신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병적 증상인 ‘작화’(作話)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전씨와 고인이 전혀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씨의 과거 정신과 치료 병력과 경찰조사 결과로 미뤄 편집증적 망상장애로 보인다”며 “독방에 갇혀 교도소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문제수’들이 편지를 조작해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은경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씨가 망상장애일 가능성이 크지만 자신을 ‘국내 카지노계 거물의 아들’이라고 동료 수감자들을 속인 것으로 볼 때 병적이고 치밀한 거짓말쟁이로 볼 수 있다”며 “남들의 주목을 받을 때 쾌감을 느끼고 심리적인 만족감을 갖는 성격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경찰 측은 “망상장애의 전씨가 장씨 자살사건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집중적으로 본 뒤 고인의 필체를 모방하고 작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전씨는 고인이 숨진 뒤 17개월 동안 독방 생활을 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전씨에 대한 처벌은 가능할까. 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쉽지않다’난 게 중론이다. 전씨는 지난해 장씨 사건 제판부에 문제의 편지를 제출했고 여기엔 고인이 언론사 대표, 대기업 총수, 거물급 연예관계자 등을 상대로 술접대와 성상납을 강요당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놓고 형법상 ‘사자의 명예훼손’ 혐의가 검토될 수 있지만 전씨는 편지를 재판부에 제출했을 뿐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볼 수 없어 처벌가능성이 낮다.


타인의 자격을 모용(冒用)하여 권리, 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문서 또는 도화를 작성한 경우 적용되는 ‘자격모용에 의한 사문서의 작성’ 죄도 편지의 경우 권리, 의무 또는 사실증명에 관한 문서를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대신 경찰은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위조 또는 변조한 증거를 사용한 자를 처벌하는 ‘위증과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 법조항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편지는 재판부에서 증거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 ‘장자연 사건’ 진행 일지
▲ 2009년 3월 7일 = 장자연 씨 분당 자택서 자살.
▲ 2009년 3월 10일 =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 담긴 문건 공개.
▲ 2009년 3월 14일 = 우울증에 의한 자살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던 경찰 재수사 착수.
▲ 2009년 3월 21일 = 장씨 전 소속사 대표 김모씨 사무실 압수수색. 건물 3층서 침대와 샤워실 확인.
▲ 2009년 4월 24일 = 경찰, 중간수사결과 발표. 3명 입건, 5명 입건 후 참고인 중지, 1명 기소중지, 4명 내사중지, 4명 불기소, 3명 내사종결 결정.
▲ 2009년 6월24일 = 일본 체류 중이던 전 소속사 대표 김씨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
▲ 2009년 7월 6일 = 전 소속사 대표 김씨 구속.
▲ 2009년 7월 10일 = 경찰, 최종 수사결과 발표. 구속 1명, 사전구속영장 신청 1명, 불구속 5명 등 7명 사법처리하고 13명은 불기소 또는 내사종결.
▲ 2010년 11월 12일 = 장씨 전 소속사 대표 김씨와 전 매니저 유모씨에 대해 징역형 선고.
▲ 2011년 3월 6일 = SBS, 장씨가 31명을 100번 넘게 접대했다는 내용의 자필편지 50여통을 입수했다고 보도.
▲ 2011년 3월 7일 = 경찰, SBS 입수 ‘장자연 자필편지’ 제보자 전모씨 재조사.
▲ 2011년 3월 8일 = 조현오 경찰청장, 장씨 문건 진위 확인 지시.
▲ 2011년 3월 9일 = 경찰, 전씨 수감 광주교도소 감방 압수수색. 장자연 원본 추정 편지 23장 국과수에 필적감정 의뢰.
▲ 2011년 3월 10일 = 경찰, ‘전씨 압수 편지봉투서 조작흔적 발견’ 발표.
▲ 2011년 3월 16일 = 국과수, ‘장자연 편지 친필 아니다’ 감정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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