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연출가 피터 브룩의 첫 내한공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연출가 피터 브룩의 첫 내한공연
  • 전은정 기자
  • 승인 2010.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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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리고 12>에 숨겨진 신학적 논쟁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피터 브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영국 무대를 셰익스피어 연극이라고 하자. 이 연극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사실적인 무대 세트를 배경으로 타이즈를 신은 남자가 큰 소리로 웅변하듯 대사를 외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피터 브룩은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현대 의상에, 흰색의 박스 무대에서, 소품도 전혀 없이 공연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피터 브룩이 전후 영국의 경직된 연극 환경에 얼마나 많은 변혁을 가져왔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출가로서 피터 브룩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로 여든 다섯 살의 피터 브룩은 그 자신이, 그의 인생을 통틀어 전통과 맞서 싸우며 모든 규칙을 허물고,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며 지난 60여 년을 살아왔다고 말하듯, 단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으려 했던, 실로 현대 연극계에 있어서는 혁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0년대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연출가로서 그 명성을 인정받기 시작해, 7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런던, 파리, 뉴욕 그리고 전 세계를 무대로 연출해 온 피터 브룩의 지난 연극 인생은 혁신과 모험, 그 자체였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20세기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오페라 작업(살로메, 1949년)을 한 것을 비롯하여 성서보다도 15배나 긴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를 9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든 것이나, 성공의 정점에서 갑작스레 파리로 떠나 철거의 위기에 놓인 뮤직홀을 파리에서 가장 혁신적인 공연장인 뷔페 뒤 노르 극장(Theatre des Bouffes du Nord)으로 탈바꿈시켜 아프리카, 인도, 일본 등 국적을 넘나드는 배우들과 진정 ‘글로벌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70년대 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일어나라 알버트/Woza Albert>를 시작으로 <양복/Le Costume>, <티에르노 보카/Tierno Bokar>, <쉬즈반지는 죽었다/ Sizwe Banzi is dead>, <11 그리고 12/Eleven and Tweleve>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작품을 통해 표현해 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에는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지금까지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몇몇 아시아 문화보다 홀대를 당하고 착취되어 왔지만 미래에는 중국 다음으로 부상할 수 있는 풍부한 문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 공연할 <11 그리고 12>는 아프리카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지도자인 티에르노 보카(Tierno Bokar)의 생애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2004년 초연한 <티에르노 보카>의 후속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아프리카의 작가 아마도우 함파테 바(Amadou Hampate Ba/ 티에르노 보카의 제자)의 책을 브룩의 오랜 동료인 마리 엘렌 에스티엔느와 함께 무대화시킨 것으로서, 종교와 정치, 사상을 아우르는 티에르노 보카의 삶과 신념을 통해 인류사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폭력 그리고 관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피터 브룩의 <11 그리고 12>는 고요하고 사색적인 작품으로,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브룩 최고의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브룩 무대 미학의 ‘단순한 아름다움’(simple beauty)이다. 나레이터가 강을 건널 때 구겨진 천은 보트가 되고, 행정관료가 새로 들어온 서기관을 무시하면서 앉아 있는 의자는 식민주의자들의 오만함을 연상시킨다. 종교 당파주의자들이 반대 부족의 발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폭력은 일본 연주자의 경렬한 포커션 연주로 부추겨진다. 당신이 무대에서 보는 모든 것은 진정한 장인정신이 빚어낸 연극의 정수이다. “나는 지금까지 매우 복잡하고 상이한 형식들을 탐구해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점점 더 단순함을 추구하게 된다. 나는 우리가 연출이라고 부르는 것, 연출의 효과들이라고 부르는 것, 그 풍부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연출 효과를 버렸을 때, 뭔가 더 큰 가치를 지닌 다른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다.” 피터 브룩은 일찍이 그가 그의 저서 <빈 공간>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카페트 한 장을 펼쳐놓은 단촐한 무대에 영국, 미국,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말리(아프리카) 출신의 7명의 다국적 배우들과 일본 전통 악기의 라이브 음악과 작은 소품만을 가지고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전통적 의미의 ‘막’의 구조를 갖지 않는 이 작품은 해설자가 등장하여 193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이 실화를 설명하는 것을 큰 얼개로 하여 배우들은 해설자가 설명하는 에피소드 속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다. 특히 극 속에서 스승(티에르노 보카)과 제자(아마도우 함파테 바) 사이에 주고받는 선문답 같은 대화들은 공연을 보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잠언록>이나 <탈무드>를 읽은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듯 피터 브룩은 다양한 연극 장치와 효과를 버리고, 연극의 기초인 텍스트로 돌아가 정치, 종교, 인종을 뛰어넘는 ‘관용’에 대하여 잔잔하고도 감동적인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2009년 11월 파리의 뷔페 뒤 노르 극장에서 초연한 후, 영국 바비칸 센터 공연 및 영국 순회 공연을 가진 바 있는 <11 그리고 12>에 대하여 영국 언론은 “결코 위협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심오한 정신과 정치적 이슈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며 거장의 귀환에 대하여 열광했다. 여든 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정열적이고 명료한 연출로 세계 연극사의 신화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명실 공히 공연예술계의 살아있는 전설, 피터 브룩. 그의 첫 내한 공연은 ‘왜 피터 브룩이 위대한지’ 명성으로만 접해왔던 대가의 작품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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